[철학의고전] 기말고사 정리

9-1
차이
우리는 이데아에 대한 파악 능력이 있다. 이것은 경험을 고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조명설을 강조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득관념(innate idea)이 있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는 이성이 지식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형성한다. 경험은 지식이 성립하는 조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추상이론을 통한 지식을 근거 짓는다. 로크는 tabura rasa(비어 있는 책)을 강조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 버클리와 흄은 로크를 따라서 경험이 지식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칸트
“우리의 지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우리 앎과 지식의 대상이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는 경험론과 일치한다. 하지만 칸트는 우리의 인식은 경험을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서 우리 인식의 아프리오리 (a priori)한 통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 전통을 계승한다. 경험은 지식 성립의 불가결한 조건이지만, 모든 지식이 다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칸트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을 종합하는 토대다. 지식 성립의 근거에 대한 칸트의 해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찬반 논쟁의 대립 속에서 진행된다. 칸트는 비트겐슈타인과 같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을 분명하게 한정함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남겨둔다. 신, 영혼, 불멸, 자유는 앎과 다른 경험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
개념(concept)의 형성
개념(concept)이란 공통을 대표(represent)하는 것이다. 개념은 어원적으로 common(con) + take(cept) 즉 공통을 취한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만 있다고 한다. 플라톤은 보편자가 있다고 한다. 중세는 보편자가 있는가(실재론), 없다(유명론), 온전실재론(보편적인 것은 작동한다는 주장)이 서로 경합하면서 싸웠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개인들만 창조했지 국민을 창조하지 않았다.”(스피노자)
우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공통을 끄집에 낸다. 추상(abstraction=ab(from) + tract(draw))이란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공통인 것을 추려내는 것을 말한다. 추상(抽象)이란 공통인 것을 뽑아낸다는 의미다.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설악산, 월악산, 속리산, 묘향산, 칠보산, 지리산, 마추픽츄, 킬로만자로, 맥킨리, 히말라야 등등이 있다. 우리는 정확히 말해서 전 세계에 몇 개의 산이 있는지 모른다. 여하튼 모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산들로부터 모든 산에 공통인 것을 뽑아낸다. 우리는 이것을 추상한다고 말한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멈추었다. 금강산은 화산활동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없다. 이렇게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산은 그 속성과 규정들이 다 다르다. 히말라야는 만년설이지만 금강산은 그렇지 않다. 산 하나 하나는 이렇게 속성들과 규정이 다 다르다. 추상한다는 것은 차이가 나는 것들을 배제하고 공통인 것만 추려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든 개별적인 산들에 공통인 것만을 추려낸다. 산은 다 정상이 있다. 산은 다 골짜기가 있다. 산은 다 흙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가 있고, 골짜기가 있고,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은 모든 산들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산들로부터 공통인 것을 추려냈다. 우리는 개념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추상한다는 것의 의미다. 즉 공통인 상을 뽑아낸다는 것이다. 개념은 바로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공통인 것을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높다(so), 골짜기가 있다.(so), 흙으로 되어 있다.(so)가 바로 산이라는 개념의 공통적인 것들이다.
개념(포섭)과 공간(포함)의 차이
공간은 크기 관계다. 큰 공간 안에 작은 것들이 포함(inclusion, contain)된다. 충주안에 건국대가 포함된다. 용인 안에 명지대가 포함된다. 충주시는 건국대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용인은 그 안에 명지대를 포함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서울 안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안에 서울이 포함된다는 것은 항상 성립한다. 전체는 그 안에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개념은 공통을 대표한다. 산(mountain)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산들을 공통으로 대표한다. 백두산은 존재하지만 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 그 안에 백두산을 포함하지 않는다. 산은 그 밑에(under the concept mountain)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설아간 등등을 포섭(subsume)하고 있다고 말한다. 개념은 공통을 대표한다. 개념은 자기 밑에 개별적인 것들을 포섭하고 있다. 백두산은 산이라는 개념 밑에 포섭된다(밑에서 위로), 산은 자기 밑에 백두산을 포섭하고 있다.(위에서 아래로)
보편 논쟁
플라톤은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세 때 보편자 논쟁의 핵심을 형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자가 있다: 실재론자
보편자는 없다: 유명론자(norminalism), only name
건전한 입장: 보편자는 개별자를 규정하는 것으로서만 그 작용의 타당성이 있다.
개념의 보편 규정 능력
산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라는 개념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산들은 공통으로 대표(represent)한다. 백두산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산은 단지 대표만 할 뿐이다. Represent<->exist
건국대 동창회는 있다. 명지대 동창회는 있다. 하지만 동창회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창회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창회들을 단지 공통으로 대표만 한다.
칸트는 개념을 공통으로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보편표상으로 정의한다. 이에 반해 직관은 개별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칸트는 직관을 개별 표상으로 정한다.
적용(위에서 아래로)과 포섭(밑에서 위로)
우리는 개념의 보편 규정을 개별적인 것들에 적용(apply)한다. 적용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우리는 산이라는 일반 개념을 백두, 금강, 한라, 지리, 히말라야 등등에 적용한다.
우리는 개별적인 것들을 개념의 보편 규정 밑에 포섭(subsume, stand under the concept)시킨다. 포섭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한다. 백두산은 산이라는 일반 개념 밑에 포섭된다. 금강산은 산 밑에 포섭된다. 히말라야는 산 밑에 포섭된다.
9-2
개념의 의미는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하는데 있다.(비트겐슈타인)
내포(connotation, intension)와 외연(denotation, extension)의 차이
개념은 내포와 외연의 측면으로 되어 있다. 내포(connotation, intension)란 절대로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내포란 so, so, so 규정을 말한다. 산은 높다(so), 골짜기가 있다(so), 흙으로 되어 있다(so)의 규정을 지닌다. 삼각형은 세 변이 있다(so), 세 각이 있다(so)으로 되어 있다. 내포란 so, so, so 규정을 말한다. 바다의 내포는 짜다(so)이다. 인간의 내포는 두 발로 서서 걷는다이다. 내포는 모든 개별적인 대상들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규정을 말한다. 내포는 모든 개별적인 대상들에 공통인 것을 뜻하기 때문에 대상들이 어떠 어떠하다고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물질의 내포는 모든 물질들에 공통인 일반 규정 즉 핵(양성자와 중성자)과 전자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소와 철은 양성자와 전자의 개수가 다르다. 하지만 수소와 철은 핵과 전자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우리는 원소들을 모두(그것이 우라늄이든 코발트이든 질소이든 탄소이든)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내포란 so, so, so 규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포를 통해 대상이 어떻다고 규정할 수 있다.
외연(개념이 가리키는 지시대상의 전체)
외연(denotation, extension)이란 개념이 가리키는(refer to)지시대상들의 집합 전체다. 산의 외연에는 금강, 백두, 한라 등등이 있다. 바다의 외연에는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지중해 등등이 있다. 원소의 외연은 수소, 헬륨, 우라늄 등등이 있다.
개념이 있다고 해서 다 지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있지만 지시대상이 없는 것을 우리는 외연이 없다(no extension), 내지는 허구적(fictional=only in mind)이라고 한다. 개념이 대상을 지칭할 수 없을 때 개념은 고립되어 있다(isolated=no relation)고 한다. 개념이 대상을 지칭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이런 개념을 외연이 없는 개념 내지 허구적 개념이라 부른다. 우리는 개념이 대상을 지칭하는지 지칭하지 못하는 지를 반드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용(내포는 있지만 외연은 없다)
인어공주(내포는 있지만 외연은 없다)
페가수스(내포는 있지만 외연은 없다)
황금산(내포는 있지만 외연은 없다)
양탄자(내포는 있지만 외연은 없다)
UFO(그 대상이 어디 있는지에 따라 현재도 설왕설래한다)
블랙홀(내포는 있지만 지시 대상도 있다)
내포는 구별(한정)의 원리
삼각형의 내포는 세변과 세각으로 되어 있다. 모든 개별 삼각형들은 다 세변과 세각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것은 공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삼각형과 이등변삼각형을 구별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내포적 규정에 있어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직각삼각형을 예각삼각형과 둔각삼각형으로부터 구별하게 하는 규정은 A2+B2=C2이다. 이것은 바로 구별(차별화, 변별력)의 근거다. 내포는 외연의 범위를 한정하는 구별의 원리다. 내포적 규정은 이 대상과 저 대상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신은 죽지 않지만 신이 아닌 모든 것들은 죽는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다는 규정이 신과 신이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원리가 된다. 내포적 규정의 차이가 바로 이 대상과 저 대상을 구별하는 근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포적 규정을 통해 그 대상에 적합한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다. 심장을 지닌 것과 신장을 지닌 것은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고유하고 적합하게 적용되는 규정을 통해서만 그 대상을 다른 대상들과 구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을 기준으로 태양보다 3~8배 정도의 별이 죽으면 중성자별이 된다. 태양보다 8~22배의 별이 죽으면 블랙홀이 된다. 모든 중성자별은 태양 질량보다 최소한 1.4배 정도의 크기를 지녀야한다. 중성자별이 되기 위한 최소 질량의 조건은 태양질량보다 1.4배 정도이어야 한다. 태양은 보통 수명이 100억년이다. 중성자별은 수명이 아무리 길어야 100만년이 안 된다. 블랙홀은 태양보다 최소 8배 이상의 별이 죽을 때 발생한다. 블랙홀은 죽은 별이고(더 이상 에너지를 방출하지 못하기에), 중력이 강하고, 모든 은하계의 중심에 최소한 하나씩 있다. 태양보다 작은 별이 죽으면 백색왜성으로 생을 마감한다. 모든 별들을 태양을 중심으로 그 질량의 차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별들이 죽을 때 그 운명은 각기 다 다르게 진행된다. 우리는 중성자별과 블랙홀을 구별해야 한다. 이렇게 이 대상 저 대상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내포적 규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포적 규정은 차별화 내지 구별의 근거로 작용한다. 별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별들의 수명은 다 다르다. 별들이 태양을 기준으로 질량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 가에 따라 별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우리는 내포적 규정을 통해 차별화의 근거로 사용한다.
Category mistake (범주의 오류 적용)
개념은 개념이 적용되는 범위가 항상 제한되어 있다. 개념은 이 적용 범위 안에서만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범위 밖으로 적용해서 사용하는 것이 개념의 오류적용이다. 길버트 라일은은 이것을 Category mistake라고 한다. 개념은 적합한 사용(adequate use)과 부적합한 사용(inadequate use)으로 구별된다. 개념을 적용할 수 없는 대상들에 적용해서 잘못 사용하는 것이 개념의 오류 적용이다. 우리는 이것을 피해야 한다. 중국집에 가서 피자를 시키면 안 된다. 결핵을 감기약으로 처방하면 안 된다. 개념의 그릇된 적용에서 오는 오류가 바로 Category mistake의 의미다.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의 의미는 개념의 적합한 사용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에 한정해서 아주 적합하게 개념의 의미를 사용해야 한다. 옥스퍼드 일상언어 학파는 이것을 언어의 화용론(use theory)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유한한 영역에 적용하는 것과 무한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지적 혼란과 파산에 직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말할 수 없는 것들에 한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신은 언어를 초월한 영역에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부적합함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초월한 신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은 불충분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신에게로 다가가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한계지움으로써 언어를 구제하고 있다. “진정한 도덕가는 도덕률을 비웃는다.”(바스칼)
이름(고유명사): 대상을 하나만 가리킨다(지시 대상이 하나만 있다). 이름과 대상이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개념: 개별적으로 있는 것들을 공통으로 대표한다. 개념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을 단지 대표(represent)한다. 칸트는 직관을 개별표상(하나만 주어짐)으로 그리고 개념을 보편표상(공통을 대표)으로 규정한다.
술어(predicate): 대상을 가리키면서 대상을 so/so/so 규정한다. 철과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 신은 완전하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술어는 항상 술어가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를 지닌다.
판단(judgement)은 참 아니면 거짓이다. 참이란 실제로 그런 것(really so)이고 거짓이란 그렇지 않은 것(not so)이다. 판단은 황금과 돌을 구별해야 하듯이(시금석試金石)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판단은 참 아니면 거짓 이 둘 중의 어느 하나의 진리값을 지닌다.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추론(inference)이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추론은 타당하게 이끌어낼 수도 있고 부당하게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 검증은 진리 검증과 같은 것이 아니다.
개념과 판단의 차이
“황금산”
황금산은 그 개념이 가리키는 지시 대상이 없다. 그래서 황금산은 공허하다(empty), 지시대상이 없다(no reference), 고립되었다(isolated), 허구적이다(fictional)라고 말해야 한다. 개념은 개념이 가리키는 지시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 개념이 지시대상과 일치할 때 우리는 adequate하다고 한다. 개념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inadequate하다고 한다. “개념의 의미는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비트겐슈타인)
“저 산이 황금이다.”
우리는 저 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이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틀렸다. 판단은 참과 거짓을 분리하는 것이다. 참이란 실제로 그런 것이다. 거짓이란 실제로 그렇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판단과 판단의 내용을 충족하는 대상과 반드시 비교하고 점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이란 실제로 그런 것(really so)이고 거짓이란 그렇지 않은 것(not so) 판단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9-3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 것인가?(How is possible he synthetic judgement a priori?)
개념과 판단의 차이
개념은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들에 한정해서만 그 적용의 타당성을 지닌다.
개념은 적합하게 사용(adequate use)하거나 부적합하게 사용(inadequate use)될 수 있다. 개념의 부적합한 사용이 바로 범주의 오류작용(category mistake)이다.
황금산: 외연은 없는 공허한 개념이다.
저 산이 황금이다: 틀린(거짓)판단
판단
판단(judgement, Urteil)은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리하는 것이다.
참(true): 명제에 상응하는 객관적 사태가 대응(really so)한다. 블랙홀은 에너지를 다 사용하고 별이 죽음으로써 형성된다. 블랙홀은 중력이 강하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서는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흐른다.
거짓(false): 명제에 상응하는 객관적 사태가 부재(not so)한다. 독일은 2자 대전 승전국이다. 독일은 패전국이지 승전국이 아니다.
타르스키의 의미론적 정의
‘눈의 희다’는 명제는 실제로 눈이 흴 때만 참이다.(‘snow is white’ is true if and only if snow is white.)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다.
True: really so / false: not so
개념의 근원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 인간은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추상 능력은 인간이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데카르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유관념(innate idea)이 있다.
로크, 버클리, 흄: 본유관념은 없다. 인간은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개념을 후험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모든 개념은 경험을 통해서만 얻는다.
칸트와 경험론의 차이
칸트는 우리의 개념이 경험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알치한다. 칸트는 이런 개념을 a posteriori concept이라고 한다. 예: 산, 강, 바다 등등
칸트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는 다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경험을 통하지 않지만 경험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a priori concept(범주)라고 한다. 예: 인과
범주의 사용
칸트는 우리의 지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하지만 우리의 지식이 다 경험을 통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Tabura rasa(비어 있는 책): 경험 없이 지식 없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앎은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을 전제로 해서 시작한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은 우리의 판단 행위를 통해서만 참과 거짓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분석판단은 경험과 무관하게 항상 참인 판단을 말한다. 분석판단은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재확인만 하는 판단에 불과하다. 부정하면 모순에 빠진다.
종합판단은 진리 기준이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종합판단은 인식을 확장시킨다. 부정하면 사태를 정반대로 알게 된다.
인식을 재확인하는 분석판단과 인식을 확장하는 종합판단의 차이
분석판단은 진리 기준이 경험이 아니라 정의의 엄격성과 직관의 자명성에 기초한다.
예: 정의의 엄격함(삼각형은 세변과 세 각을 지니며 그 합은 180도이다.) / 직관의 자명성: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종합판단은 참과 거짓의 구별을 경험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험적 종합판단의 성립 가능성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이외에도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영국 경험론은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칸트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분석적(analytic) | 종합적(synthetic) | |
A priori | 항상 참인 판단 | 칸트는 이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것이 왜 가능한가에 대한 정당화 근거를 제시한다. 이것이 칸트 비판철학의 근본의미다. |
A posteriori | 형용의 모순 | 참 아니면 거짓 |
지각판단과 경험판단의 구별
지각판단: 이 물체는 무겁다. (후험적 종합판단)
경험판단: 모든 물체는 연장(확장 가능한 크기)을 지닌다. (선험적 종합판단)
10-1
단지 비판의 길만이 열려 있다. (Nur der kritische Weg ist offen. / Only the critical way is open.)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앎의 성립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묻는다. 우리 앎의 한계는 무엇인가? 칸트의 철학은 앎의 한계를 통해서 앎이 할 수 있는 것과 앎으로 할 수 없는 것의 명백한 경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철학의 가능한 물음들이 대답된다고 하더라도 삶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비트겐슈타인)
비판(krinein)이란 한계를 설정하고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우리 판단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어지는 것에 한정한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 것들(신, 영혼 불멸, 자유)은 앎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앎의 한계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에 한정해서만 우리 앎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넘어서 있는 것)한 것들에 한해서는 앎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앎은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앎이 모두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로크는 경험 없이는 지식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Tabura rasa(빈 책)
칸트는 경험론과 같이 우리 앎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에 한정해서만 이런 것들에 대한 앎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것을 감성을 통한 수용성으로 규정한다. 우리의 앎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칸트는 앎이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고 해서 앎이 경험을 통해 다 해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칸트는 경험론과 구별된다.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들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들을 a priori로 규정한다. 칸트적인 맥락에서 a priori는 경험에 선행하거나(before the experience) 아니면 경험으로부터 독립(independent of experience)된 것을 뜻한다.
1) 시간과 공간(time and space): 순수 감성형식(수용성의 주관적 조건들)
2) 범주(category): 순수 규정형식(결합의 주관적 조건들)
앎이란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범주를 통해 통일하는 데 있다. 앎은 항상 감성과 오성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Rein(pure): 경험과 섞이지 않았다의 뜻
A priori <-> a posteriori
경험에 앞선다 혹은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경험 뒤에 혹은 경험을 거치고 나서
Transcendental(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선험적
칸트의 비판철학은 경험으로부터 독립하거나 경험에 선행하는 것(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수 감성형식과 범주라는 순수 규정 형식)을 통해서 경험 자체를 가능하게 하거나 경험을 성립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경험론은 경험으로부터 지식이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인식될 자료를 수용할 뿐 경험의 자료들을 묶고 종합하는 것은 우리의 오성 범주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를 비판하고 지식의 보편 타당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경험론과 칸트의 차이
로크(경험론자들 모두)는 모든 개념은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흄은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개념을 통해서만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흄은 칸트에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한다. 칸트는 모든 개념이 다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우리 주관 안에서 기초하고 있는 a prori concept (category)이 있다. 칸트는 범주를 통해서 경험을 설명하고 근거짓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에 맞서서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칸트는 경험론의 도전에 응해서 범주를 통해 판단과 경험이 성립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칸트는 이것을 지식의 비판철학의 성립 근거로서 정당화하고 있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성립 가능성
칸트는 수학의 학문적 성립근거와 자연과학의 학문적 성립 근거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칸트에 따르면 이 두 학문은 모두 “선험적 종합판단”에 속한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 것인가?” (How is a priori synthetic judgement possible?)
경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주를 통해서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이 바로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그래서 칸트는 영국 경험론의 도전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과 다르게 경험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칸트 철학 전제는 바로 이것을 정당화하는데 있다. 이것이 칸트 비판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속한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경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범주의 근원, 적용, 적용의 한계
칸트는 경험에 그 근원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통해서 경험이 성립한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칸트는 범주를 통해 우리 앎이 성립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하지만 범주가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제한된다. 범주가 이 영역 밖으로 적용하고자 할 때 범주는 필연적으로 이율배반(antinomy)에 빠진다. 칸트는 이 경계를 가능성의 조건들을 따지고 정당화하는 것을 앎의 대상으로 한정한다. 하지만 앎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을 무제약자(the unconditional)로 규정한다. 이것은 신, 영혼 불멸, 자유에 속한다.
“신을 사고할 수는 있지만 신을 인식할 수는 없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단지 비판의 길만이 열려 있다.” (칸트)
“학습된 무지” (docta ignorantia 쿠자누스)
칸트의 인간학
칸트는 물자체(Ding an sich, thing in itself)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리 앎은 현상영역에만 한정된다. 현상과 물자체는 칸트 이원론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우리의 인식은 항상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전제로만 성립한다. 칸트는 우리 인식이 항상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물자체를 사고할 수는 있어도 인식할 수는 없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어도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10-2
내가 제공한 규정에 내가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 자유다.
Maxim=private rule
칸트는 각 개인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지침을 maxim(private rule)으로 정의한다. 나에게 해당하는 행위 원칙이 타인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칸트는 도덕법칙(moral law, Gesetz)을 모든 도덕 주체들에게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도덕법칙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이다.
Maxim = subjective, relative
차이
칸트는 maxim에 따라 행동할 경우 이것이 모두에게 타당하다는 보장이 없다고 보았다.
형식적 명령: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방식으로 행위하라.
Action in accordance with The universalization of maxim = maxim = relative(particular) universal validity
보편화 요구
너는 네가 행동할 때 네가 하는 행동이 너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형식적 보편성)
“너는 준칙들에 따라 행동하라. 너는 그 준칙을 통해서 동시에 이것이 보편법칙이 될 수 있도록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B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
합법성과 도덕성의 차이
Legality: action in accordance with given norm (미리 주어진 규범에 일치하고 적용하는 행위)
주어진 규범이 무제약적으로 타당하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규정에 따라 행동했다.
Morality: action from duty (의무로부터 비롯되는 행동, 무제약적 보편성에 따른 행동)
너의 행동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동의 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자율= self determination
칸트는 자율(autonomy=self determination)과 타율(heteronomy)을 구별한다.
모든 도덕 법칙은 이성이 오로지 자신의 규정을 통해서만 산출된다. 도덕 법칙은 밖이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 전통, 자연, 사실 등은 외적인 것이다. 칸트는 모든 행위자들을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 모든 도덕 법칙의 형성 근거로 설정한다. 나는 나의 의지를 규정할 때 의지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도덕 법칙의 발생 근거: 이성적 주체의 자기 규정으로부터 발생한다.
도덕 법칙의 타당성 근거: 이성적 주체가 내린 결정이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자유= 내가 준 법칙에 내가 자발적으로 따르고 복종한다.
자유= 도덕법칙에 대한 자발적 복종
각자의 도덕 주체가 내리는 규정이 모든 도덕 주체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
목적
수단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 목적이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Thing <-> person
인간은 타인을 대할 때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해야 한다.
“너는 너의 인간성을 너의 인격에서나 타인들의 인격에 있어서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고 결코 수단으로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
“handle so, daB du die Menschheit, sowohi deiner Person eines jeden anderen,jederzeit als Zweck,niemals bloB als Mittel brauchst.”
“so act that you use humanity, whether in your own person or in the person of any other, always at the same time as an end, never merely as a means.”
대화 윤리
마틴 부버
나- 너 관계(Ich-Du – Relation)
나- 그것 관계(Ich- Es – Relation)
하버마스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주체로서 인간을 대우해야 한다.
형식적 보편성에 대한 비판
형식적 보편성 <-> 내용적 보편성
칸트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엇을 하라고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가 하는 행동이 모든 도덕 주체들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한다고 형식적 강제만을 요구한다. 칸트 비판가들은 칸트의 윤리학이 형식적 강제만을 제시할 뿐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조국을 위해 희생해야 할까? 아니면 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해야 할까? 우리는 도덕적 결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그 주어진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행동하듯 너도 그렇게 보편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도덕 원칙은 무엇인가?
레리스탕스에 가담해야 할지 아니면 홀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모셔야 할 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의 결단이 인간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결단일 수 있는가?
10-3
미적 판단 보편화 가능성
판단력비판
진리판단은 참과 거짓을 분리하는 것이다. 도덕판단은 행동이 보편적으로 구속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검증한다. 미추(beauty/ugly)판단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근거를 따진다.
칸트는 미를 진리나 도덕에 종속시킨 전통 미학을 비판한다. 미는 진리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이 미의 자율성이다.
영국 경험론은 미의 기준을 주관적 취미에 둔다. 취미는 강제될 수 없다. 볼프는 미의 기준을 개념이나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한다. 이것은 너무 엄격하다. 칸트는 미가 주관적 취미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칸트는 취미의 보편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칸트는 볼프와 같이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의 객관적 기준은 그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구속력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주관적 취미판단이지만 이 취미 판단은 모든 이들에게 보편화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이 점에서 칸트는 미적 판단의 보편화 요구를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한다.
강제를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 일치를 형성하는 노력
미는 기준이나 보편 규정을 척도로서 강제할 수 없다. 파르테논 신전은 황금비레를 따른다. 하지만 타자마할묘는 황금비례를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아름답다. 미적 기준의 강제성은 그런 미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 칸트는 미가 개념의 보편 규정을 강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보편성 요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미는 개인들의 주관적 취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개인들의 주관적 취향이 미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취미의 전제군주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취미의 보편화 가능성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취미의 주관성을 인정하면 서도 칸트는 취미 자체를 보편적인 것으로 고양하고 보편화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취미 능력의 개방성이 요구된다.
진리 판단은 개념의 보편 규정을 통해서 개별적인 것을 규정한다. 미적 판단은 개념을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적인 것을 판단한다. 진리는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곧 진리는 아니다. 미는 개별적인 대상들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기초하지만 이 주관적 판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화에로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칸트는 이 보편화에 대한 가능 근거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
미적 판단은 도덕 판단과 구별된다. 어떤 도덕적 행위는 아름답다. 도덕은 당위에 관련한다. 도덕은 모든 인간들의 행동을 보편적으로 구속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에 반해 미적 판단은 구속력이 아니라 보편화에 대한 무제약적 호소에 기초한다.
‘미적 취미 판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 타당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미적 주체들에 대한 보편적 호소다. 나의 판단에 대해 타인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것에서 미적 판단의 보편성이 확보된다.
미란 사심 없는 즐거움에 기초한다. 미는 모든 주관적 관심들과 목적 연관들로부터 자유롭다. 칸트는 이것을 무목적의 합목적성으로 규제한다. 미적 즐거움은 개념을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념의 보편 규정에 버금가는 그런 보편성을 충족하는 것에 기초한다. 칸트는 이것을 상상력의 종합과 오성의 조화로운 놀이로 규정한다. 놀이는 규칙의 강제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보편화 요구에는 자발적으로 따르고자 한다. 칸트는 이 조화 가능성을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로운 일치로 논의한다.
칸트는 미적 보편화를 주관적 보편성으로 규정한다. 주관적 보편성은 내가 대상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나 판단을 나 아닌 다른 주체들도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에 기초한다. 칸트는 이것을 공통감각(common sense)으로 규정한다.
미와 숭고(The Sublime)의 구별
미는 개념을 동반하지 않는 상태에서 보편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에 기초한다. 칸트는 이것을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로운 일치(놀이)로 논의한다. 숭고는 상상력이 이성의 이념(초월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부적합하다. 상상력의 활동은 이성이념을 파악하거나 드러내는 데 있어서 부조화를 경험한다.
수학적 숭고함과 자연적 숭고함
수학적 숭고는 절대적인 크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수는 확정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종합하는 파악은 좌절된다. 자연적 숭고는 우리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위력과 힘에 대해 인간이 무기력을 경험한다. 하지만 인간 안에서는 이 자연의 위력을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의 감정이 생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의 힘을 통해 자연을 능가하고자 하는 초월에의 욕구가 발동한다.
상징
상징은 두 차원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 초감성적인 것을 감성적인 것을 매개로 해서 드러내는 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간접적이다. 감각을 매개로 해서 감각을 초월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적 상징이 추구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 인간이 현상의 영역에서는 인과 필연의 지배를 받지만 예지계의 영역에서는 자리고부터 비롯되는 인과(자유)의 주체가 된다. (homo phenomena versus homo noumena)
11-1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ion)의 정당화 요구
보편 구속력의 요구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인간의 근본 덕으로 제시한다. 중세는 이것 이외에도 믿음, 소망, 사랑을 인간의 7주덕으로 제시한다. 지혜, 용기, 절제는 개인들의 덕과 연관된다. 하지만 정의는 나와 타인을 공통으로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 모두 연관된다. 사람이 혼자 살 때는 정의나 계약은 필요 없다. 규범(norm)이란 인간과 인간을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구속력을 규범의 구속력의 근거를 제시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사회 계약론의 핵심이다.
존재론적 속박(ontological commitment)
이론은 이론이 적용되는 대상들에 한정해서만 타당성과 지배력을 유지한다. 이론의 대상에 대한 적합성과 구속력이 바로 존재론적 속박이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에 의해 지배된다: 홉스와 순자는 이 점에서 성악설을 대표한다. 성악설에 해당하는 인간들이 있다. 성악설은 성악설이 적용되는 인간들에 한정해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히틀러는 성악설로 설명된다.
인간은 이타적 본성에 의해 지배된다: 루소와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한다. 성선설이 이론이 적용되는 인간들에 한정해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쿨베 신부는 성선설로 설명된다.
Domestication(길들이고) -> Culture(문화화) -> Moralization(도덕화)
인간은 이기성과 이타성의 혼합된 존재이다.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성은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이기성은 사회 성립을 위해 제어되고 규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파괴하는 반사회적 본성들을 통제하고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하튼 인간은 교육되지 않으면 안 된다.”(칸트) 칸트는 이 과정을 Domestication(길들이고) -> Culture(문화화) -> Moralization(도덕화)로 제시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반사회적 파괴성과 개인의 도덕성을 대립시킨다. 사회 전체는 모든 구성원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통의 규범을 확보화기 위해 인간의 반사회적 파괴성을 극복하고 길들이고 통제해야 한다.
홉스의 자연 상태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무한투쟁(struggle of all against all, war of all against all)으로 제시한다. 여기에는 안정된 지배나 제도적 안정이 없다. 인간은 법의 지배를 통해서 자연 상태의 무질서를 떠나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서로가 계약을 맺어야 하는 이유다.
범이 부재한 자연 상태를 떠난다는 것은 법의 공적인 지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을 묶어줄 수 있는 규범을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지배가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가 정당한 지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계약은 지배자체의 정당화 내지 지배 자체의 합리화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때만 성립한다.
종이호랑이와 솜방망이의 극복
“칼이 없다면 계약은 휴지조각이다.”
“법은 진리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기초한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구별된다.
권위는 정당화된 질서(the justified order)에 기초한다.
사회 계약론은 법을 통해 지배 자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살인은 금지된다.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법이 공정하게 지배한다는 것을 말한다. 규범은 오로지 인간 공동체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Egoism(이기주의), individualism(개인주의)
유아론(solipsism)은 천상 천하에 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동존재에 어긋난다.
이기주의는 타인을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태도다.
개인주의는 나도 소중하고 너도 소중하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인정한다. 나의 권리가 소중하듯이 너의 권리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만큼 타인의 권리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일방적인 관게가 아니라 상호성에 기초한다.
근본악(das radikale Bose)
칸트는 인간의 반사회적 파괴성을 근본악에의 성향(Hang)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안에는 인간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근본적인 반사회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의 사회성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이것을 반드시 근절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칸트는 인간의 반사회적 파괴성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 성립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반사회적 사회성(die ungesellige Gesellingkeit)으로 규정한다. 인간과 인간을 묶어주는 공통의 규범적 질서는 인간 공동체를 질서로서 유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법이 지배하지 않는 야만성의 상태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인간은 법이라는 공적 규범이 재비하는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파이데이아(paideia)
루소는 에밀에서 어린애에게 물건을 갖다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린애는 그럴 경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루소는 어린애로 하여금 물건이 있는 쪽으로 어린애를 데려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린애도 세상에 적응하는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공동 조건을 익히고 배운다. 윤리 교육은 인간이 사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공적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같이 공유하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사적인 이기주의를 넘어서 공적인 시민이 되는 조건을 같이 학습하는 것이 윤리 교육의 목적이다.
상호인정의 실현을 통해 조야한 이기주의를 극복
홉스의 자연 상태는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한 무한투쟁과 전쟁상태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brutal egoism)가 지배한다. 여기서는 상호인정과 지배의 안정성 그리고 법의 공적인 지배가 없다.
헤겔은 모두를 통해서 모두를 인정(recognition of all through all)하는 곳에서 인간의 공동존재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헤겔은 이것을 “나=우리”의 통일이라고 본다. 상호인정의 실현이 공동체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되는 즐거움을 가능하게 한다.
나=우리, 우리=나 (Ich, das wir, und wir, das Ich)
“의식은 타자의 죽음을 바란다.” (헤겔, 인정 관계의 불평등)
주인과 노예의 양극화는 불평등한 관계다. 주인은 지배하고 노예는 지배당한다. 이것은 갑과 을의 부당한 관계다. 인간은 자신이 인정하는 자들에 의해 인정받을 때 행복하다. 주인과 노예의 불평등한 인간 관계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주인과 노예의 일방적인 관게를 상호 동등한 인정의 관계로 변환시켜야 한다. 주인을 통한 주인의 인정이 되어야 한다. 스토아학파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니체는 주권적 삶을 요구한다. 자립한 개인들이 자립한 개인들을 서로 인정할 때 인정 관계는 상호성을 충족시킨다. 이것이 바로 동등한 권리 주체들이 서로가 서로를 통해 상호 인정을 실현하는 것이다.
11-2
각자에게 그에게 속한 것을 사람에게 평등한 법을 주자(foederis aequas dicamus leges)
정의
사람이 혼자 살 때 정의는 필요 없다. 하지만 인간이 모여서 사는 곳이면 어김없이 인간과 인가을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질서가 요구된다. 사회는 항상 정의라는 규범적 근거를 통해서 묶여진다. 인간과 인간을 공통으로 묶어주는 규범적 구속력이 바로 정의다. 따라서 사회는 정의를 토대로 해서 성립한다. 사회 성립의 근거는 결국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공적 행복을 실현하는 데 있다.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인간의 4주덕으로 규정한다. 중세 그리스도교는 믿음, 소망, 사랑을 추가하면서 이것을 인간의 7주덕으로 규정한다.
사회 계약론(social contraction)은 지배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에 기초한다.”(홉스) 권위(authority)란 정당화된 질서(the justified order)다. 권위주의는 억압과 폭력과 기초한다. 이에 반해 권위는 공적 구속력에 기초한다. 법을 통한 정당한 지배가 바로 권위의 근거다. 권위는 공적 구속력에 기초한다.
정의가 법의 근거다. 그 반대는 아니다. 정의는 공적 질서를 공정하게 집행하기 위해 힘을 지닌다. 우리는 이것을 공권력이라고 한다. 공권력은 단순한 힘과 구별된다. 정의는 무기력한 종이호랑이가 아니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법은 정의를 집행하는 한에서만 강제력을 행사한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정의에 기초하지 않을 때 국가는 도적떼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정의는 법의 규정 근거이다. 법은 정의의 집행이고 실현이다. 정의는 법을 통해 공적 구속력을 행사한다. 악법은 힘은 있지만 정당성이 결여되었다. 따라서 악법은 법의 자격이 없다. 정의는 법을 통해 공적 구속력을 정당하게 집행해야 한다. 사회는 정의에 기초하고 그런 한에서 정의를 따르고 집행해야 한다. 정의에 기초한 사회가 가장 행복하다. 정의는 공적 행복이다. 행복은 개인의 덕과 법의 공적인 질서가 서로 일치할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인간들은 법이 지배하는 곳에서 공적 행복을 느낀다. 안정감, 질서, 평화는 법의 공정한 집행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칸트는 우리에게 법이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한번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
“잔인함과 탐욕과 야망은 인간을 그르치는 세 가지 악덕이지만 사회가 국가를 방어하고 상업과 정치를 키우고 나아가는 공화국의 힘과 부와 지혜를 쌓는 것은 이러한 악덕을 통해서이다. 지상의 인간을 파멸시키고도 남을 이 세 가지 악덕으로 사회는 시민의 행복을 만들어낸다.” (지암바티스타 비코)
“우리는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환경 재난은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바로 이곳, 지금 이 순간보다 세계 전체, 영원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초개인적이고 초시간적인 보편이익을 생각하지 못하면, 국소적이며 즉각적인 특정 이익마저 잃게 된다.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 자신들을 책임질 수 있다.” 바슬라프 하벨 [불가능의 예술]
동물들은 자기 보존의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 사자는 생존하기 위해 누구인가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식용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 성립에 있어서 본능과 자기 보존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제어되지 않은 이기심을 무제약적으로 충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이익과 자기 보존 그리고 자기 실현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체와 사회 성립의 근거가 단지 자기 유지나 자기 보존으로 좁게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들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두 가지 비유
(1) 무지의 면사포(veil of ignorance): 우리 모두는 정의를 형성함에 있어서 재산, 전통, 특권, 능력, 성별의 차이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모든 인간을 공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그렇기 때문에 정의가 형성되려면 정의는 서로가 모든 제약된 조건들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비유가 바로 무지의 베일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제한된 모든 조건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에 대해 무지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제약된 것들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 모두는 모두에 대해 무지의 면사포를 쓰고 있다.
(2) 원초적 입장(the original position): 모든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 즉 모든 인간들은 제약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은 모든 인간들을 공통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에다가 자신들을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발적으로 복종한 것에 따르는 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정의의 공적인 지배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이 복종하고 따라야만 하는 공적 질서에 스스로를 묶어둔다. 이것이 원초적 계약 내지 근원 계약의 의미다. 롤즈의 원초적 입장과 칸트의 근원 계약은 같은 것이다. 루소는 칸트를 앞질러서 “각자가 자신이 준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다.”라고 주장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
정의는 모든 구성원을 공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강제력을 말한다. 인간의 권리는 모두 동등하다. 우리 모두는 무지의 면사포를 동반한 채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동의한 질서에 대해서만 복종할 뿐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 행사가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도록 그렇게 보편적으로(공적으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법은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 법은 모두가 모두를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 모두에게 공정한 공적 구속력을 집행한다. 법은 모두를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 모두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같은 것은 같게
같은 것은 같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교환적 정의다. 우리 인간의 권리는 모두 같다. 따라서 권리에 있어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권리는 동등하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나 다 공평하게 대우받아야지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는 자연의 권리를 지닌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권이다. 모두가 자연권을 소유하기 때문에 이 자연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의 권리는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 대해 부당한 억압과 지배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니다. 이익은 정의의 근거가 절대 아니다. 이익이 아니라 상호 동등한 권리가 정의의 조건이다. 우리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이기성을 극복해야 한다.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은 인간 권리의 근거다. 따라서 인간의 권리행사에 있어서 모든 인간에게는 동등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같은 것을 같게 대하는 것이 등가적 정의의 기초다.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와 가장 광범위한 전체적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롤즈 [정의론] 267)
롤즈는 정의론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라는 가장 우선시되는 권리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 동등하게 부여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훼손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도덕적 평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내재 가치를 가진다는 원칙이다. 사람은 재능이나 사회에 대한 기여 면에서 불평등하고, 보상과 자원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 면에서도 불평등하다. 그러나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임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필립 셀즈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미국 독립선언) 모든 인간은 서로 동등한 권리(equal right)를 지녔다. 모든 사람들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법은 정의의 집행으로 모든 사람들을 법 밑에 종속시킨다. 법은 모두에게 절차적으로 보장된 규정을 집행함으로써 모두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이것이 법치의 기본이다.
인간은 양도 불가능한 존엄성의 주체다. 인간 각자는 고유한 존재이고 대체불가능한 존재이다.
다른 것은 다르게
인간의 능력은 다 다르다. 능력은 다르기 때문에 그 사용에 있어서 차등을 적용해야 한다. 차이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차별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억압과 폭력이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은 극복되어야 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재능의 실현은 적극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그 능력 사용의 정당한 결과에 대해 차등을 인정해야 한다.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의 불평등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준다는 것은 모두가 획일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건의 평등, 수단의 평등은 보장되어야 한다. 출발선에서 부당한 출발이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등한 기회 보장 아래서 이루어지는 결과의 불평등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시장에서의 경쟁의 자유는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정당한 불평등은 허용되지만 부당한 불평등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는 차등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당한 불평등은 허용하고 부당한 불평등은 시정해야 한다.
(1)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정의로운 저촉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2)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결부되도록 배정되어야 한다.
정당한 불평등은 허용되지만 부당한 불평등은 시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변함없는 정의의 요구다. 하지만 우리는 정당한 불평등과 부당한 불평등의 근거 제시에 있어서 서로 입증책임(burden of justification)을 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판단이 오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판단의 부담(burden of judgement)을 인정하면서 이것을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이것을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지혜를 짜내야 한다. 정치는 이런 지혜의 예술이다.
11-3
절차적 합볍성, 결과의 정당함
공정(fairness)으로서의 정의
조건의 평등: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경쟁 조건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우연이나 특권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가 동등하게 제공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수단의 평등: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해야 한다. 역차별을 피하는 한에서 경쟁수단을 합리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결과의 불평등: 공정한 조건들 아래서 진행된 경쟁은 결과에 있어서 차등으로 귀결된다. 이 정당한 불평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평등은 획일화가 아니다. 기회의 동등한 부여는 허용되지만 경쟁 결과의 불평등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정당한 불평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부당한 불평등은 시정되어야 한다. 기회 균등의 보장과 절차적 합리성에 따라 진행되는 투명한 경쟁이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 불평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유란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는 자의가 아니다. 자유는 상호성에 기초한다. 이에 반해 자의는 의지의 폭군과 일방성에 기초한다.
유아론: 나 밖에 아무 것도 없다.
이기주의: 타인은 어떻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
개인주의: 나와 타인이 다 같이 소중하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상호 인정 아래서 서로의 권리를 지킨다.
자유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능력을 타자와의 연관 아래서 공정하게 사용하는 것에 기초한다. 타자에 대한 상호 인정 아래서만 자유는 자신과 타자 모두를 만족할만하게 진행된다. 자유가 일방적인 지배로 곡해되면 자유의 기반 자체가 파괴된다. 왜냐하면 부당한 지배는 각자의 권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극단은 극단을 초래한다. 자유의 부당한 사용은 반대로 폭력과 테러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다 오른쪽으로 쏠리면 배는 침몰한다. 나치와 파시즘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다 왼쪽으로 쏠리면 배는 침몰한다. 공산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같은 권리를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민주정치도 독재나 폭력이 가능하다(소크라테스의 죽음). 옳은에 기초하지 않고 다수결이 모든 것을 결정할 때 이것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제어되지 않을 때 시장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렇게 될 경우 재앙이 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제어되지 않을 때 시장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렇게 될 경우 사회는 양극화되는 위험이 있다. 배는 침몰하지 않고 항해해야 한다. 즉 균형을 잡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사적인 권리를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목적을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할 때만 가능하다. 칸트는 이런 시민을 공적 시민이라고 보았다. 정치가와 정치꾼이 구별되듯이 사적 시민과 공적 시민은 구별된다. 독일은 두 번의 전쟁을 통해서(머리가 안 좋다. 한 번 실수로 충분한데도)칸트의 소중한 유산을 재발견했다. 우리의 권리와 판단 능력이 공적으로 올바르게 사용될 때 한해서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정의의 지배는 이 점에서 행복한 사회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회복하는 정의(restorative justice)
정의는 모두가 모두를 구속함으로써 모두가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공적 질서다. 우리 모두는 법이라는 공적 질서 안에서 안정감과 행복을 느낀다. 법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될 수 없다. 범법자는 공적인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사실은 공적 질서 안에서 질서와 행복을 느끼는 인간 모두에게 테러를 가한 자이다.
범법자(犯法者)는 법을 파괴한 자이다. 즉 그는 우리 모두를 파괴한 자다. 따라서 법은 법을 파괴한 범법자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왜냐하면 법은 범법자를 처벌함으로써 법이 어떤 경우에도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의 자기 회복이다. 법은 복수가 아니라 공적 처벌을 통해 범법자에게 법의 공적인 질서는 어떤 경우에도 훼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법이 범법자를 처벌함으로써 법이 손상된 권위와 질서를 회복하는 힘이 바로 회복하는 정의다. 처벌은 공정하고 형량 역시 적절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법을 공격하므로 그는 반역자가 된다.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국가의 구성원(일원)이 아니다. 사실 그는 국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경우 국가를 보전하는 것과 그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서로 양립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죄를 지은 이 사람이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시민이 아니라 적으로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중에서)
우리 모두는 법 안에서 그리고 법을 통해서 공적 자유를 누린다. 법을 파괴한 자는 우리 모두를 파괴한 자다. 법은 법을 파괴한 자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법은 정의를 집행하고 따른다. 따라서 법은 범법자(우리 모두를 파괴한 자)를 반드시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이 범법자를 처벌함으로써 법의 손상된 공적 권위를 다시 찾는 것이 바로 회복하는 정의다. 법은 종이호랑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솜방망이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 법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 법은 복수가 아니라 공정한 처벌에 기초해야 한다.
“광신주의자들의 열성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볼테르)
“자유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거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이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어떤 구성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때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는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자신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밀의[자유론])
국가
국가의 기초는 정의다. 국가는 이익 단체나 특권 단체가 아니다. 국가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들의 절대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한다. 국가는 보편의지에 기초한다. 절차적으로 법을 공정하게 집행함으로써 개인에 대한 권리 사용이 억압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정의에 위배되는 국가는 국가의 자격이 없다.
“정의에 기초하지 않을 때 국가는 도적때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티누스)
법은 어떤 경우에도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 자유인은 법의 폭력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가장 잦은 재앙은 불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격의 의롭지 못함 즉 불의에 기초하고 있다.” (칸트)
“우리는 한 분의 거룩한 지배자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이 분이 인간에게 거룩한 것이라고 준 것, 그것이 인간의 권리이다.” (칸트)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건 필요로 하지 않건 간에, 그가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간에, 그것이 그 사람의 권리라면 나는 그것을 충족시켜 줄 의무가 있다.” (칸트)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정의롭다.”
“정의란 법에 일치해야 하는 동시에, 평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동시에 평등을 어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저녁밭도 샛별도 정의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밤하늘의 별도, 새벽하늘의 별도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가장 완전한 미덕이 정의다.” “공정은 인류를 용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란 확고하고 변함없는 의지가 각자에게 각자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그런 태도(habitus)다.” (토마스 아퀴나스)
“정의는 영혼의 질서다. 우리는 영혼이 질서에 의해 그 누구의 하인으로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만의 하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나에게 이런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한다는 것은, 불의를 당한 나에게 보다 불의를 행한 자이게 더 나쁜 일이네” (소크라테스)
“법을 법이게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이다.” (홉스)
“정의란 시민법이 정한 것처럼 각자의 것이 각자에게 되돌아 가기를 바라는 우리 영혼의 불변하는 성향이다.” (스피노자)
12-1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들 오류(fallacy) <-> 틀렸다(wrong)
오류(fallacy)와 판단(judgement)의 차이
오류(fallacy)란 틀린 것이 아니라 연결이 잘못된 것을 말한다. 오류는 추리에서만 나타난다. 오류 분석은 판단 분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추론에 있어서 오류는 전제로부터 결론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이 연결이 부담(부적합)하게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오류(fallacy)란 틀린 것(false)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류란 연결이 부당한 것을 말한다. 연결된 것들 중에는 자세히 보면 그렇게 연결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적합하게 연결한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오류를 바로잡는 사고 훈련을 해야 한다.
판단(judgement)이란 항상 참 아니면 거짓 둘 중의 어느 하나의 진리 값을 지닌다. 참은 옳은 판단이다. 거짓은 틀린 판단이다. 판단은 진과 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한자로 이것은 시비를 가리는 것이다. 황금과 돌을 구별하는 것을 시금석이라고 한다. 화성에 생명체가 산다. 이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블랙홀은 빛조차 탈출할 수 없다. 이 판단은 참으로 밝혀졌다.
모든 판단은 참 아니면 거짓 인가를 분리해야 한다. 오류는 틀렸다가 아니라 연결이 부당한 것을 말한다. 추리의 오류는 추리가 타당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언어 사용의 오류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애매성의 오류(the fallacy of ambiguity): 두 가지 이상의 해석 가능성
He killed me with a gun,
1) 그가 총으로 나를 죽였다.
2) 그가 총을 들고 있는 나를 죽였다.
모호함의 오류(the fallacy of vagueness): 기준(criteria)이 불명확할 때 발생
국가는 가난한 자를 도울 것이다.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것을 하면 단속한다.
예술은 상연이 되지만 외설은 상연이 되지 않는다.
합성의 오류
부분은 성립한다 부분이 성립하니까 전체가 성립한다고 추론하면 이것은 합성의 오류에 빠진다. 전체는 부분들의 합과 같은 것이 아니다. 부분이 성립하는 것을 토대로 전체가 성립한다고 추론하면 오류다. 공수부대는 부분적인 전투는 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합전투도 잘한다고 추론하면 오류다. 공수 1개 사단과 육군 1개 사단이 전쟁하면 육군이 항상 이긴다. 왜? 공수부대는 소규모 게릴라성 전투는 잘하지만 육군은 종합 전투를 잘 하기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단, 피구, 라울 등 세계에서 제일 잘 하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팀이 스페인 리그와 유럽 리그에서 우승한다. 선수를 하나 하나가 가장 우수하다고 해서 팀 전체가 항상 1등 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할 때 요소 요소의 소스들이 맛있다고 해서 이 소스들을 합친 전체 음식이 항상 맛있는 건 아니다.
분해의 오류
전체는 성립한다. 전체가 성립한다는 것을 토대로 부분도 성립한다고 추론하면 이것은 분해의 오류에 빠진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전체로서 좋다고 해서 그 구성원들 하나 하나가 다 최고인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다. 그러므로 미국인들 하나 하나가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고 추론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하다고 해서 미국인들 하나 하나가 다 경쟁력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전체적으로 태권도를 잘 하자미나 그렇다고 한국인들 하나 하나가 다 태권도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양궁 메달을 독식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 하나 하나가 다 양궁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국가 전체의 복지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들 하나 하나가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부유하다고 해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다 부유한 것은 아니다.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
이것은 흔히 begging the question이라고도 한다. 마차가 말을 끌 수는 없다. 그 반대로 말이 마차를 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어 arche, 라틴어 principium은 가장 앞서가는 것 즉 근거를 말한다. 근거는 모든 것을 지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근거는 먼저 타당한 것으로 성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출발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 beyond doubt, out of question. 수학에서 공리는 가장 확실한 출발이다. 이것으로부터 정리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논리에서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보증한다.
문제가 있는 것(in question, in problem)은 출발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음을 충족해야 한다.
해외 여행을 하려면 여권을 먼저 만드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여권이 없는 상태에서 비행기표부터 사면 우리는 먼저 선결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나 압박을 받는다. 비행기표를 사는 것보다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여권을 먼저 만드는 것이다. 여권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여행을 할 수는 없다.
독일은 식민지도 확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은 식민지를 관리하는 부서를 미리 만들었다. 식민지도 없는데 식민지를 관리하는 부처를 먼저 만들었다면 이것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우자도 아직 없다. 그런데 신혼 살림을 먼저 장만하면 이것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신혼 살림이 먼저가 아니라 배우자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면허도 없는데 자동차를 사서 차를 운전한다. 차를 사서 운전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면허를 따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에 속한다.
코로나 19의 백신이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는데 질병이 다 극복되었다고 선언하면 안 된다. 전염병에 대한 종결이 먼저가 아니라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우선이다.
창업도 하지 않았는데 주식부터 먼저 상장한다.
순환논쟁의 오류
말 그대로 A를 요구하면 B를 제시하고 B를 요구하면 A를 제시함으로써 순환에 빠진다. 순환논증은 설명이 아니라 단지 순환성을 통해 같은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마약을 하면 졸립다.
왜? 그 이유는?
왜냐하면 마약에는 수면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 근거가 아니다. 졸리운 것과 수면효과는 사실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마약의 어떤 화학성분이 우리의 부교감 신경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유 내지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졸립다와 수면효과는 순환논증에 있을 뿐이다.
코란은 옳다. 왜? 마호메트가 말했기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말한 것이 어째서 옳은 것인가? 알라가 그렇게 계시했기 때문이다. 알라가 그렇게 계시한 것이 어째서 참인가? 왜냐면 코란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코란에 적힌 것이 어째서 참인가? 왜냐하면 마호메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순환적이다. 순환 논쟁은 설명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설명 근거가 아니라 논의를 다른 것을 통해서 대체하거나 교환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순환 논쟁은 거의 동어 반복으로 끝나는 것이다. 같은 것을 통해서 같은 것을 다시 반복하기 때문에 순환 논쟁은 무의미하다.
순환 논쟁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지 다른 것을 통해서 대체하기 때문에 이 논쟁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대인논쟁(ad hominem)의 오류
우리는 비판과 비난을 구별해야 한다. 비판은 주장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주장을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비난은 욕하는 것이다. 비판은 건설적이다. 비난은 파괴적이다.
우리는 어떤 주장을 하는 자에 대해서 그 주장의 객관 타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그래서 그 주장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주장하는 자의 근본 쟁점은 건드리지 않은 채 주장하는 사람을 공격할 때 우리는 대인 논쟁의 오류에 걸려든다. 주장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인신 공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인 논쟁은 금지된다. 모든 논쟁은 무엇에 대한 권리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한 설들을 충족해야 한다. 대인 논쟁(toward man)은 설득이 아니라 인신 공격을 하기 때문에 매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우리는 논쟁할 때 주장의 설득력과 주장하는 자를 구별해서 말해야 한다. 상대방이 싫다고 해서 상대방이 주장하는 논거가 다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장하는 자의 논거가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평가의 기준이지 주장하는 자 자신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논쟁은 감정에 휘두르게 해서는 안 된다. 논쟁은 설득력의 근거를 얼마나 잘 충족하는 가에 따라 평가된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 전혀 검증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말만 믿고서 이것을 토대로 유대인을 절멸하고자 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객관적 검증보다도 유대인 탄압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 박해를 수단으로 악용했다.
유대인 의정서는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유대인을 강제 고문해서 받아낸 허위 자백서이다. 히틀러는 유대인 의정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유대인이 금융 지배를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공격했다. 사태에 대한 진위 파악도 하지 못하고 유대인에 대한 맹목적 증오로 인해 그는 비판이 아닌 비난만 늘어놓고 있다. 5500만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검증하지 않고 그의 맹목적인 대인 논쟁에 의해 놀아났다는 것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독일의 정치적 미성숙이다. 역사는 같은 것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독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더시 저지르지 않도록 뼈 아픈 반성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잊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다.”
유추는 항상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유추는 유사성과 차이 모두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A와 B의 유사성을 근거로 A와 B를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 때 우리는 유추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유추는 어떤 때는 성립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추는 대개 발견을 목적으로 추리한다. 하지만 유추를 통한 발견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유추는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모든 유추가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 칩을 똑 같은 크기로 교체하면 잘 작동한다. 이것은 성공이다. 같은 부품을 다른 부품으로 대체해도 작동한다.
인간의 간의 크기와 돼지의 간의 크기는 같다. 우리는 컴퓨터 칩을 교환하듯이 돼지의 간을 인간의 간에 이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식은 면역거부반응으로 인해 실패할 수도 있다. 간 이식은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칩과 간 이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칩의 교체가 성공했다고 해서 간 이식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토끼는 독 당근을 잘 먹는다. 하지만 인간이 독 당근을 먹으면 즉사한다. 독일은 사람을 죽이면 형벌이 최소 5년부터 시작한다. 한국은 사람을 죽이면 형벌이 최소 7년부터 시작한다. 독일에 적용되는 살인죄 처벌과 한국에 적용되는 살인죄 처벌은 다르다.
12-2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
무연관성의 오류(the fallacy of irrelevance)
무연관 내지 부적합성은 주장과 결론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거나 부적절한 설명을 제시할 때 일어난다.
트럼프는 전문의사가 아니다. 그는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있어서 코로나19를 잠시 지나가는 유행병으로 진단했다. 그리고 코로나19를 심한 독감 정도로 규정했다. 코로나19는 백신이 없어서 치료가 힘들지만 독감은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다. 그는 코로나19의 원인을 마치 독감으로 규정했기에 사태에 부적절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미국은 가장 많은 환자들과 사망자를 기록하는 불명예를 남겼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원인으로부터 적합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독감, 결핵은 유사성은 있지만 절대로 같은 것이 아니다. 주장과 결론 사이에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연관성과 적합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원인이 전혀 지지할 수 없는 결과를 지지하든지 아니면 주장이 전혀 지지할 수 없는 결론을 지지하면 이것은 무연관성 내지 부적합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연관성은 대개의 경우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 논점은 일관성과 적합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과 적합성을 충족하지 못하면 논쟁은 대개 빗나가게 된다. 화폐개혁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그 근거를 제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화폐에 그려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개혁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논점 일탈에 해당한다. 화폐의 그림을 바꾸는 것은 화폐 개혁과 무관하다.
감기 걸린 자에게는 감기약을 처방해야 한다. 독감은 그것에 적합한 약을 처방해야 한다. 결핵은 그것에 적합한 치료약이 있다. 코로나19는 인류가 처음 접하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아직 이것에 대한 치료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해 전문의들이 권하는 여러 조처들을 따라야 한다. 트럼프는 전문가도 아니면서 전문가의 조언이나 충고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는 가래로 막을 것을 써래로 막는 위기를 자초했다. 막을 수 있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은 그의 무연관적(부적합한) 추론 때문이다. 그는 틀린 것이 아니라(이것도 포함되지만)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코로나19를 독감 정도로 규정한 것은 아주 부적절한 진단이다. 진단이 적합하지 않았기에 처방도 올바를 수 없다. 트럼프는 무연관성 내지 부적합성의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독일의 헌법학자 한스 페퍼도 한국의 방역 대응을 “히스테릭한 파시스트 보건정책”이라고 부적합한 오류를 저질렀다. 왜냐하면 한국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개인들에게 상황에 잘 대처하는 처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공신력을 바탕으로 개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는 것과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한스페퍼는 한국적 상황에 대한 무지와 자산의 선입관으로 얼룩진 얼토당토 않은 비난을 하고 있다. 그는 비판과 비난을 혼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어느 여자 변호사는 한국의 방역 대처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의 방역 조치는 전체주의적 인권 침해에 기초해서 진행된다고 그녀는 한국의 방역을 비난했다. 그녀는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여과되지 않은 채 비난하고 있다. 생명이 있고 난 다음에 인권이 있다. 죽고 나서 인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국은 감염된 자를 추적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격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를 통제하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다. 방역을 철저히 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감염되어 고통을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조치다. 자유는 방임이 아니다. 정당한 통제와 부당한 통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은 정당한 통제를 통해 모두가 상생하고 원윈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개인들은 국가의 방역 조처에 대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은 감염에 걸린 자를 격리 조치함으로써 이차 감염을 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지는 것이다. 프랑스는 국가 전체와 도시 전체를 폐쇄했다.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의 조치가 바로 전체주의적 통제에 가깝다. 개인의 기본권도 소중하지만 생명은 더욱 더 소중하다. 한국은 개인의 기본권 침해가 아니라 격리 조처를 통해서 전체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서울에서 직접 취재한 프랑스 여기자는 그녀의 무연관적이고 부적합한 오류를 바로잡았다. 무연관성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신중 또 신중하게 추리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설명의 적합성이 있어야 한다. 주장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항상 연관성을 충족해야 한다.
불가도출의 오류(non sequitur)
주장이 그 주장에 적합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고 그 주장이 지지할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할 때 발생한다. 진화론은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을 지지하는 것이지 강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strongest)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으로부터 강자생존을 도출하면 이것은 부적합하다.
유전자 복제는 자연에서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종이 멸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취해진다. 우리는 체세포복제를 통해 인공 수정을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종의 절멸을 극복한다. 유전자 복제가 필요한 경우는 자연종의 성비 균형이 맞지 않아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유전자 복제는 종의 멸종을 막기 위해 취해지는 것이지 우생학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 복제가 우생학을 지지하는 것으로 된다면 이것은 불가도출의 오류에 빠진다. 유전자 복제는 종의 멸종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적합성을 지니지만 우생학이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장으로부터 전혀 도출될 수 없는 결론을 이끌어
내면 이것은 불가도출의 오류에 빠진다.
다윈의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을 주장한다. 자연종들은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아니면 잘 적음함으로써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악어는 공룡보다 잘 적응했기에 살아남았다. 공룡은 가장 강한 포식자이지만 멸종했다. 다윈의 자연도태설은 이 점에서 경험적 증거를 통해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진화론을 잘못 알아들었다. 그는 강자생존(the survival of the strongest)을 주장한다. 하지만 공룡은 강한 포식자이지만 멸종했다. 진화는 적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강자도 진화의 과정에서 도출 당한다. 이 점에서 진화론은 적자생존을 지지하는 것이지 절대로 강자생존을 지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히틀러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으로부터 강자생존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했다. 이것이 바로 불가도출의 오류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the 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
귀납은 전제가 결론을 경험적으로 지지하는 일반화의 정도에 관한 추론이다. 귀납에서는 필연이 배제된다. 귀납 추론에서는 전제가 결론을 지지하는 정도가 항상 몇%로 측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지 정도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 정도에 대한 정확한 표현 대신에 모든 것을 총괄해서 과도하게 일반화하면 우리는 부정확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우리는 전체 중에서 해당되는 것과 해당되지 않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해당되는 것과 해당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지 말고 모두 하나로 묶어서 말하면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성급하게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주로 귀납추리에서 발생한다. 전체 중에서 해당하는 정도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전체 중에서 해당하는 정도와 전체 중에서 해당하지 않는 정도를 구별해서 말하는 것은 필수다. 이 구별을 무시하고 모두를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이것은 오류다.
“독일은 5500만이 잠재적으로 다 나치였다.” (힌나 아렌트)
독일인들 중에는 나치를 지지하는 않는 자들이 적어도 1932년까지 68%였다. 1932년 총선에서 나치는 32%의 지지를 얻었을 뿐이다. 독일인들 모두가 나치에 대한 동조자가 아니었다. 독일인들이 나치에 대해 동조하기 시작한 것은 나치가 일당독재를 통해 모든 것을 강제로 총동원할 때 부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전체를 나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속한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히틀러 암살이 42(44)번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중에 한 번도 성공한 것은 없다.
독일 혼자서 유대인을 600만을 죽였다. 독일이 유대인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독일이 유대인을 죽일 때 독일에게 유대인 장부를 넘겨준 국가들이 많았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등등 거의 모든 유럽의 국가들이 독일에 유대인 장부를 넘겨준 것이다. 우리는 이 차이를 망각한 채 독일 혼자 단독으로 유대인을 죽였다고 일반화하면 안 된다. 우리가 한 사태에 대해 정확한 통계 자료를 없이 모든 것을 과도하게 일반화해서 말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싸잡아 말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구별해서 신중하게 말하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1) 증거 불충분의 오류: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결론을 내리면 결론이 신빙성이 없게 된다.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수뢰딩거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물리학자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 내리면 이것은 증거가 너무 빈약한 상태에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론이 너무 비약되어 있다.
2) 편향 통계의 오류: 증거가 충분하더라도 증거가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이것은 편향 통계의 오류에 빠진다. 편향 통계는 증거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이 증거들이 대표성을 결여하게 되는 위험과 단순성이 있다. 카탈루니아 사람들만 표본조사하면 스페인에 대한 전체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을 내릴 수 없다.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편식을 예방한다. 증거가 한쪽으로 쏠려서 대표성이 결여하게 되면 결론이 너무 치우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3)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귀납에서는 필연이 배제된다. 귀납에서는 전체 중에서 해당하는 정도와 전체 중에서 해당되지 않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런 구별을 하지 않을 때 해당되지 않은 것을 마치 해당되는 것처럼 취급하는 오류에 빠진다. 이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12-3
정당한 행위와 부당한 행위
자연주의적 오류추리 (naturalistic fallacy)
사실은 그렇다는 것만 알려준다. 당위는 어떠해야만 하는 가를 정당화한다. 사실과 당위는 구별된다. 윤리판단은 당위 판단에 해당한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면 이것은 자연주의적 오류 추리로 비판된다.
성폭행범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폭행이 정당하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성폭행범이 있다고 해서 이것으로부터 성폭행이 정당하다고 추론하면 이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추리를 범하는 것이다.
성폭행범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폭행이 정당하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성폭행범이 있다고 해서 이것으로부터 성폭행이 정당하다고 추론하면 이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추리를 범하는 것이다.
두 판단력의 차이
규정하는 판단력: 일반 규정과 법칙이 있다. 우리는 일반 규정을 개별 사례들에 보편적으로 적용한다. 개별 사례들은 일반 법칙 밑에 포섭되어서 규정된다.
반성하는 판단력: 일반법칙은 없다. 하지만 개별 사례들은 있다. 개별 사례들을 규정할 일반 법칙의 규정을 찾아내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성하는 판단력의 사례들
우주는 현재 팽창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우주가 어떤 근거에서 팽창하고 있는 지에 대한 근거나 규정을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한국 사회에는 분명히 동성애자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합법적인 부부인지에 대해 규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논쟁적 테마로 남아 있다.
체세포 복제로 태어난 복제인간도 인간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우리는 처음 겪는 이런 현상에 대해 그 규정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책임 윤리
“나는 선택한다. 나는 나의 선택이 전 인류를 위한 선택이기를 바란다.”
선택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샤르트르의 선택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변형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형싱적이듯이 샤르트르의 선택 역시 형식적이다.
“나는 결단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하이데거나 슈미트의 결단론은 무엇을 결단하는 가에 대한 책임 규정이 없다. 다만 통치자가 결단한다는 것만 강조한다. 누가 결단하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
진정성의 윤리(Gesinnungsethik): 행위가 산출한 결과와는 관계없이 행위 하는 자의 주관적 절대성(동기의 순수함, 의무와 헌신)에 따라 행동한다. 잘못되면 테러리즘으로 악용될 수 있다.
책임 윤리(Verantwortungsethik): 행동이 산출할 결과에 대해 신중하게 처신한다. 인간 행동이 산출하게 되는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함으로써 그 행동에 대해 무제약점 책임을 진다. 따라서 도덕적 심사숙고에 따른 절대적인 책임을 뒤따른다.
진리와 진정성(윤리)의 차이
진리는 사태의 객관성에 기초한다. 진리는 사태의 참에 기초한다. 진리는 강제성이 있다. 진리는 물적 강제에 기초한다. 진리는 사태의 참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행동은 진정성(authenticity)에 기초한다. 억압과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고 진실을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좋은 사회를 만든다. 규범적 올바름과 진정성에 따른 행동이 수반될 때 우리는 정의가 지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절차적 합법성과 정당성의 차이
절차적 합법성이란 주어진 규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어진 규정이 타당하거나 옳다는 구속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규정에 따라 행동(action in accordance with~)하면 이것은 합법적이다. 나치의 관료들은 합법적으로 행동했지만 그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정당성(legitimacy)이란 그 행위가 반드시 구속력을 충족해야 한다. 규정에 따르는 순응적 행위가 아니라 규정이 옳고 구속력이 있는 가에 대한 도덕적 반성과 검증을 요구한다. 옳거나 타당하거나 구속력이 행위의 조건이 된다. 이것이 행위의 정당성이다.
규범적 폭력
규범이 공적 구속력을 결여하고 규범이 적용되는 대상들에 대해 부당한 것을 집행할 때 규범은 폭력이 된다. 불법은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모두의 자발적 동의를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고 복종하는 규범에 한정해서만 따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은 규범이 우리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할 때 우리는 이 규범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규범적 폭력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시민 불복종과 저항권
로크는 시민불복종과 저항권을 인정한다. 대표자가 자신이 위임을 받은 권한을 악용하거나 부당하게 사용할 때 시민들은 그를 소환할 수 있다. 명령이 부당할 때 그 부당함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법이 부당하게 행사될 때에 한해서 저항권이 정당화된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옳지 않은 것을 바로잡을 때 한 해서만 저항권이 긍정된다.
13-1
Religion (인간이 묶여 있다)
뉴턴은 자신을 물리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로 규정했다. 그는 연금술에 미쳐 있었다. 왜? 신이 자유롭게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갈릴레이는 수학은 자연의 암호로 규정한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연을 창조하는 신을 이해하는 것을 뜻했다. 수학은 신이 자연에 심어 놓은 암호였다. 자연의 수학화는 자연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접근이다.
파스칼은 우리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과 철학자의 신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성을 사용해서 자연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창조하는 신을 보다 잘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자연과학은 신의 창조를 증거한다. 신은 목적성이고 모든 것을 저화 가능하도록 창조했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서 이 세계를 가장 좋은 것으로 규정한다.
시계 태엽의 비유는 결정론적 세계상의 은유적 표현이다. 자연의 목적성과 역사의 목적성은 질서와 조화로서 긍정된다.
그리고 자연 현상의 이해에 있어서 시계 태엽은 결정론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Seculum(관계가 끊어졌다)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을 맹신한다. 그리고 인간 이성을 통해 미래를 완전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굳게 믿었다. 인간 이성이 알 수 없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은 없다. 인간이 신을 대신해서 미래나 자연을 완전히 파악하고 정복할 수 있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이나 열역학 통계법칙 그리고 엔트로피 현상들에 직면하면서 자연과학에 대한 맹신은 도전 받기 시작했다. 현대의 양자론은 인과 결정론이 아니라 확률적 통계에 의해서만 자연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니체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선포한다. 인간에게 의미인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니체는 이 당혹감을 피하지 않는다. 삶이란 힘애의 의지(wille zur Macht, will to power)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맹목적으로 살려고 하는 의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를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로 대체한다. 세계는 목적도 없고 질서도 없고 오로지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증명과 증거의 차이
증명은 수학에서만 통용된다. 증명은 공리가 정리를 100% 확실하게 성립시키는 것을 보증한다.
증거는 결론을 받쳐준다. 증거는 결론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단지 믿게 할 뿐이다. 증거가 많으면 그 만큼 결론이 튼튼해진다.
다윈의 진화론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설, 성선택설, 공통조상론으로 특징지워진다.
종은 변한다. 이것은 종은 항구적이다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 이해를 반박한다.
다윈의 핀치새, 검은 자작나무나방과 흰자작나무 나방은 자연도태설을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이다.
우연 혹은 섭리(provisio)
베르그송은 삶의 비약(엘랑비탈)과 생명의 약동하는 자기 창조를 진화론 비판으로 제시한다.
진화론은 생명의 진화가 우연과 유전자 재조합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본다. 우연의 인정은 자연의 목적성을 배제한다.
비약과 초인
키에르케고어는 모든 것을 논리화하는 헤겔의 범논리주의(panlogismus)에 맞서서 실존적 비약을 강조한다. “단독자가 진리다.” “주체성이 진리다.” 실존한다는 것은 신적인 삶으로 비약하는 데서 획득된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초인의 삶을 강조한다면 키에르케고어는 실존적 비약을 통해 신과 마주하는 개인의 고유성을 강조한다.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 (포이어바흐)]
변화된 인간의 위상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는 근대 이성 만능주의에 맞서서 진화의 우연성,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 창조, 무의식을 강조한다.
계몽적 낙관주의와 합리성은 인간이 과학을 통해 미래를 완전히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연의 등장과 인간의 반사회적 파괴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낙관할 수 없었다. “창조의 어떤 계획에도 신은 인간의 행복을 의도한 적이 없다.” (프로이트)
인간의 자기 소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칼 마르크스는 아주 탁월한 분석을 제시한다.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인간의 유물론적이고 경제적인 토대를 파헤친데서 마르크스의 고유성이 있다.
항쟁성 : 확실성과 불안 사이에서 동요
자유의지와 결정론
목적론(teleology) 대 기계론(mechanism)
창조와 진화
체계의 개별성(헤겔과 키에르케고어)
라이프니츠(the best world)와 쇼펜하우어(the worst world)
13-2
우리는 법칙을 통해 자연을 설명하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적 삶을 이해한다.
두학문의 차이
딜타이는 자연과학이 진리를 독점하는 시대에 철학적 해석학을 제시한다. 체험, 표현, 이해, 해석은 개별적인 삶들을 파악하는 데 적합하다. 자연과학은 법칙을 통해서 개별 현상들을 설명(explain)한다. 이에 반해 인간의 역사적 삶들은 이해(understanding)될 뿐이다. 딜타이는 설명과 이해의 구별을 통해서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각기 다르게 근거짓고자 했다.
신칸트학파의 빈델반트와 키레르트는 이것을 개성기술적 여사학과 법칙정립적 자연과학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 근본 의미는 서로 같다.
학문의 특징
수학은 증명한다. 증명은 공리가 정리를 100% 확실하게 성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수학적 증명은 필연적이다.
자연과학은 가설을 공적으로 검증한다. 가설이 공적으로 통과되면 정식 이론으로 인정된다. 가설이 공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가설은 폐지된다.
자연과학은 법칙을 통해 개별 현상들을 설명한다. 앎의 힘은 예측하는 데 있다. 이론의 힘은 예측하는 데 있다. 자연과학은 법칙을 통해 개별 현상을 예측한다. 개별 현상들을 법칙 밑에 포섭되어서 설명된다. 예측과 설명은 한 사태의 상이한 측면이다.
인문학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것을 총칭해서 인문학으로 일단 분류한다. 인문학은 개별적 삶들을 그 삶들의 고유한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똑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역사의 사건들은 절대로 같은 것이 똑같이 일어나지 않는다. 개별적인 것을 그 자체로서(법칙이 없기에)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누가 해석하는가?
괴테 이전에도 괴테는 없었다. 괴테 이후에도 괴테는 없었다. 괴테는 유일무이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 이전에도 셰익스피어는 없었다. 셰익스피어 이후에도 셰익스피어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의 개성적 인물인 셰익스피어를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하나의 해석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공감을 통해서만 타당성을 얻을 뿐이다.
개별적인 것을 그 개별성에서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의 고유한 과제이다.
수학과 자연과학의 차이
수학은 증명한다. 증명은 필연을 다룬다.
필연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삼각형은 예외 없이 모두 180도이다.
과학은 가설을 공적으로 검증한다.
자연과학에서 법칙은 개별 현상들을 지배한다. 하지만 법칙은 예외를 허용할 때가 있다. 예외가 있는 법칙은 필연적이지 않다.
예외 없는 법칙과 예외를 허용하는 법칙
모든 물질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은 예외 없다. 이 때 법칙은 필연적이다.
양서류 중에서는 직접 새끼를 낳는 동물들이 있다. 아나콘다와 살무사는 포유류처럼 직접 새끼를 낳는다.
Law without exception = necessity
Law with exception = no necessity
법칙 포괄형 모델(the covering law model)
모든 물은 0도에서 언다. 수도관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온도는 마이너스 5도다. 예측: 이 수도관은 파열한 것이다. 법칙을 통해 미리 예측한다.
수도관이 파열했다. 수도관이 파열한 이유 내지 원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수도관이 파열한 개별 현상을 일반법칙을 통해 그 원인을 설명한다.
개성기술적 삶의 이해
왜 유독 다른 국가도 아니고 독일만이 2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켰는가?
우리는 이 개별 현상을 그 자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역사는 자연과학과 다르다. 역사는 개별 현상 등을 규정할 법칙이 없다.
개별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독일이 2번의 전쟁을 일으킨 이유 내지 원인을 밝혀야 한다. 이것을 밝히는 것이 바로 해석과 이해의 고유한 몫이다.
니체의 전망주의
“사실은 없다. 단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
“철학자들은 세계를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중요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
해석학은 우리의 이해가 이미 선이해(preunderstanding)나 선판단(prejudice)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우리의 선이해를 공감 가능한 보편화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데 있다. 모든 이해는 상호 이해로 개발될 필요가 있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세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파우스트,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에토벤의 합창 교향곡,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등은 다 개별적인 작품들이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고유한 문맥과 배경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 개별적인 것들은 누구에게는 이해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해의 공감 능력을 확장시킴으로써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의 보편성은 상호주관적 동의를 얻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개별적인 것들이 이해되고 공유된다는 것이 인문학의 고유성이다. 인문학의 정당성은 개별적인 것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는 데 있다. 베버는 왜 유독 유럽에서만이 자본주의라는 문화가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아주 설득력 있게 잘 제시한다. 우리는 베버의 해석에 공감하거나 공감하지 않을 뿐이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기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13-3
위험 있는 곳에는 구원도 함께 자란다 (휠더린)
규정하는 판단력과 반성하는 판단력의 차이
규정하는 판단력은 일반법칙이나 보편 규정이 있다. 그리고 개별 사례들도 주어진다. 우리는 일반법칙을 개별 사례들에 적용한다. 개별 사례들은 일반 법칙 밑에 포섭되어서 규정된다.
반성하는 판단력은 일반 규정이나 법칙이 없다. 하지만 개별 사례들은 주어진다.
반성하는 판단력은 개별 사례들을 규정할 일반 법칙이나 보편 규정을 찾아내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창조적 과제의 문제에 속한다.
모든 물은 0도에서 언다(일반법칙 내지 보편 규정) 수도관에 물이 있다. 현재 수도관의 기온이 마이너스 5도다. 수도관이 터질 것이다 라고 우리는 미리 예측(prognose)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수도관이 터졌다. 왜 파열한 것인가? 원인 내지 근거는?
우리는 수도관이 파열한 개별 현상을 일반법칙(모든 물은 0도에서 언다)을 통해 설명한다. 개별 사례들은 일반 법칙 밑에 포섭되어서 설명된다.
패러다임 대체(paradigm shift)
이론과 경험의 충돌은 이론을 수정하도록 한다. 패러다임을 통해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의 증가는 패러다임을 교체하도록 강요한다. 학문은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발전한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체되었다. 과학의 시행착오(trial and error)는 가설과 함께 그러나 가설에 거역해서 전개된다.
반증이론: 모든 이론들은 반증에 견뎌낼 수 있는 한에서만 잠정적으로 진리의 자격을 유지한다.
니체의 전망주의
니체에 따르면 모든 사실은 특정한 누구인가가 내리는 관점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사실은 없다. 다만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사실은 그 사실을 형성한 인간의 가치 연관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사실을 만든 인간의 자기 이해가 항상 전제되어 있다.
위기 사회와 위험 사회의 차이
예측(통제) 불가능한 자연의 숨어 있는 위험 가능성이 위기로 나타난다. 코로나19 앞에서 전 세계는 무기력을 경험했다.
인간이 사전에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무책임하고 나태하고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위험 사회의 병리 현상이다.
위기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이 그 안에 지니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힘은 우리가 원천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하지만 위기를 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 위기와 환경 파괴에 대해서 전지구적인 연대와 각성된 책임이 요구된다.
위험 사회는 인간 스스로가 무책임하고 불성실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건물만 제대로 지어도 지진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사고 사회는 후진국형 재난 사회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안과 공포의 차이
공포는 항상 무엇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공포는 공포를 초래한 것을 제거하면 안정된다. 무엇 때문에 공포스럽기 때문에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면 공포는 사라진다. : 핵전쟁, 실업, 코로나19 때문에 공포 내지 두려움을 느낀다.
불안은 대상이 없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의해서 불안을 경험한다. 따라서 불안은 그 대상이 없기에 제거할 수도 없다. 인간의 삶이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무의 경험이 인간이 불안을 느낀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Constellation(성좌, 별무리들)
하늘의 별자리들은 항상 움직인다. 고정불변하지 않다. 하늘의 별자리들은 항상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지도 않는다. 별들의 위치는 서로 긴장을 유지하면서 긴장된 움직임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현상에 대해 다양하게 다른 입장들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경합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 생명인가? 수정 시점부터, 착상 시점부터, 세포, 조직, 기관이 형성되는 시점부터, 출생시점부터
경합하는 논쟁들
철학은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하려는 열린 시도이다.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다양한 대답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태는 상이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계를 넘고 나서야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지평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의 해결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역동성을 지속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14-1
진리는 사태의 참을 따르는 데 있다.
Logos
인간에게는 logos, ethos, pathos의 능력이 있다. 중세는 이것을 verum(truth), bonum(the good), pulchrim(the beautiful)의 능력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 진, 선, 미의 능력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로고스는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하는 것(the adequate use of concept), 판단의 진위검증(truth/falsity), 추론의 타당성(validity/invalidity)으로 구분한다.
개념을 형성하는 추상능력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보편자의 지위를 놓고서 논쟁한다. 중세는 보편자 논쟁을 둘러싸고 설왕설래한다.
개별자만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개별자들로부터 공통인 것을 추상하는 능력이 있다. 개념은 인간이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공통인 것을 추려내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직관을 개별표상으로 규정하고 개념을 보편표상(공통을 대표한다)으로 규정한다.
적합한 사용
“개념의 의미는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개념을 추상해서 얻어냈고 이것을 다시금 대상들에다 적용한다. 개념이 대상에 구체적인 연관을 얻는 것을 우리는 개념이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내포와 외연의 관계
개념에 있어서 내포(connotation, intension)란 공통을 대표하는 규정을 말한다. 칸트는 이것을 보편표상(보편적인 것을 대표한다)으로 정의한다.
개념에 있어서 외연이란 개념이 실제로 가리키는(refer to) 지시대상들의 집합 전체를 말한다.
용, 페가수스, 인어공주 등등은 내포적 규정은 있지만 그 개념이 가리키는 지시 대상은 없다. 따라서 허구적이다. 오딧세이는 우티스(ou tis, nobody)를 통해 개념과 실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포적 규정들과 외연의 지시 대상들은 필연적으로 반비례한다. 내포적 규정들은 이 대상들과 저 대상들을 구별하는 것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정의는 인간에게만 있고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는 없는 것의 차이에 기초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생명체이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라는 내포적 규정이다. 정의(定義, definition)란 구별하는 것에 기초한다.
개념과 판단의 차이
황금산 : no extension, no reference, fictional, isolated (no relation)
“저 산이 황금이다.” : 틀린(거짓) 판단이다.
범주의 오류적용
개념은 항상 적용되는 대상들의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그 규정이 효력을 유지한다. 적용할 수 없는 대상에다가 개념을 적용하면 개념은 category mistake(개념의 오류적용)를 저지른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misplaced concreteness(잘못 놓여진 구체성) 으로도 사용된다. 이 둘은 의미가 상호 교환 가능하다.
판단의 진위 검증
빈학파(Wien circle)는 “검증가능한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 자체가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반증 가능성: 진리가 반례(counter example)로부터 자신의 진리 주장을 방어하는 한에서만 유지된다.
모든 판단은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진릿값을 지닌다. 다만 진리의 검증 기준이 경험에 있는가/없는가에 따라 분석 판단과 종합판단이 구별된다.
차이
분석판단은 항상 참인 판단이다. 직관의 자명성(전체는 부분보다 크다)에 의하거나 정의의 엄격성(삼각형은 180도이다)에 의해서 항상 참이다. 부정하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 애 낳는 남자는 모순이다.
종합판단은 참 아니면 거짓이다. 경험과의 비교 검증을 통해 명제의 진릿값을 결정할 수 있다. 부정하면 사태를 정반대로 알게 된다.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하지만 모든 앎이 다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이외에도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c judgement a priori)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흄은 이것을 의심한다. 칸트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정당화한다. 이 싸움이 영국 경험론과 칸트의 근본 논쟁을 형성한다.
“단지 비판의 길만이 열려 있다.”
칸트는 앎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앎의 한계를 초월한 영역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신에 대해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신에 대해 사고할 수는 있다. 물자체는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추론의 타당성 검토
판단의 틀림과 추론의 오류는 구별된다. 판단은 명제가 참 아니면 거짓인가를 구별한다. 오류는 전제와 결론의 연결이 타당한가 부당한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자금성은 서울에 있다 (거짓)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
그러므로 자금성은 한국의 수도에 있다. (거짓)
전제가 거짓이기 때문에 결론도 거짓으로 도출되었다. 즉 추론이 일관성 있게 타당하다.
몇 가지 주의해야만 하는 추론의 오류들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i): 논의의 출발이 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beyond doubt, out of question). 이에 반해 문제투성이 상태(in problem, in question) 출발하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부딪힌다. 해외 여행이 먼저가 아니라 여권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불필요한 순환 논쟁을 피하라.
무연관성(irrelevance)을 피하라. 특히 불가도출(non sequitur)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논쟁의 쟁점을 논쟁하는 당사자와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인논쟁을 피해야 한다. 성급한 일반화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
자연주의적 오류추리: 윤리적 판단에서 발생한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성립할 수 없다.
로고스적 존재 로서의 인간의 위상
우리는 개념을 그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들에 적합하게 연관시켜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개념을 대상에 적용시켜서 규정한다. 판단이란 개념의 적합한 적용과 규정을 통해 그 참과 거짓이 판가름 난다. 우리는 추론할 때 연결을 적합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
진리는 사태의 참을 참으로서 알아듣고 따르는 데 기초한다. 인간에게 공통인 것을 따르는 것 이것이 로고스이다.
14-2
각자에게 그에게 속한 것을 (플라톤)
존재론적 속박(ontological commitment)
존재론적 속박이란 이론이 적용되는 대상들에 한정해서만 이론이 제한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홉스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다(homini hominem lupus).
루소는 성선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천사다. “타자의 얼굴은 나를 인질로 잡는다.”(루이 레비나스)
사회계약론 (social contraction)
중세는 법의 근원이 신의 명령에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신의 정당한 명령이 자연법의 근거다. 자연법은 인간이 만드는 법의 근거다. 이것이 신을 통해 인간에게 하향적으로 적용되는 자연법의 목적론적 위계질서다.
근대는 이 법의 근원을 신이 아니라 인간들을 공통으로 묶는 것에서 확보한다. 이것이 세속화(seculum, 신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졌다)의 의미다.
칸트의 근원계약 (der ursprüngliche Vertrag)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규범적 구속력이 바로 사회 계약론이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홉스가 말하는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하는 무한투쟁과 전쟁(war of all againsy all, struggle of all against all)에서는 공통의 질서가 없다. 모두가 모두를 구속하고 강제하는 법의 안정된 지배가 확보되어야 한다. 헤겔은 모두가 모두를 통해 상호인정을 얻는 상태(recognition of all through all)만이 사회 성립의 근거라고 정당화한다.
지배의 합리화 충족
모든 사회는 지배가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가 지배 자체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을 묶어줄 수 있는 규범적 구속력과 강제력이 바로 법의 근거다. 법은 정의를 따름으로써만 그 강제력을 발휘한다. “권력은 정당성에 기초한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법은 모두가 모두를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만 모두가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데 따른다. 법은 정의에 기초하는 한에서만 그 정당성을 얻는다. 법치국가(rule of law)와 법을 통한 통치(rule by law)는 구별된다.
절차적 합법성과 정당성의 구별
악법은 법의 자격이 없다. 악법은 정당성이 결여되었다. 하지만 악법도 그것이 작용하면 악법에 따라야할 강제력이 있다. 특히 독재국가일수록 법 규정에 따를 것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법규정에 대한 일치 내지 순응은 합법성에 따른 행동이다. 악법에 대해서는 저항권과 시민불복종을 통해 그 불법성을 수정할 수 있다.
정당성은 절차적 합법성이 구속력과 타당성을 충족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비판한다. 정당성은 규범 자체의 타당한 구속력을 충족하는 것에 기초한다.
롤즈 정의론의 두 축
무지의 요구: 모든 인간은 그가 처한 인간적 특수성이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인간을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토대가 확보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무지의 면사포가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 같은 처지에 있다. 이것이 원초적 입장의 요구다. 우리 모두는 다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는 치자=피치자의 동등성에 기초한다. 우리는 원초적 입장에서 모두를 공통으로 묶어줄 수 있는 규범에다가 우리 자신을 묶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정의의 근거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자유 우선성이란 모든 인간의 권리가 같다는 것에 기초한다. 인간의 권리는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다 다르다. 인간의 능력 사용에서 오는 차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모두가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사회적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차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Government by discussion
자유는 불평등이 부당하게 심화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정당한 차등은 인정된다. 정당한 불평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부당한 불평등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정당한 불평등과 부당한 불평등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핵심이다.
자연의 법칙은 물적 강제에 기초한다. 이에 반해 인간의 법은 인위적 강제에 기초한다. 법의 공정한 지배(under the law) 아래 있다는 것은 법의 정의를 집행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법치국가의 핵심이다.
누구의 정의인가? 어떤 정당성인가?
법칙은 물적 강제에 기초한다. 법칙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을 때(natural law without exception=necessity) 필연적 강제를 지닌다. 예외가 있는 자연법칙(natural law with exception)은 필연적이지 않다.
법은 물적 강제가 아니라 인위적 강제이다. 인간이 인간을 강제하고 처벌한다. 이 법은 예외를 두는 경우와 예외를 두지 않는 경우로 구별한다. 예외를 허용하는 것과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의 결정은 누가 하는 것인가? 이것이 법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처벌과 복수의 구별
복수(revenge)는 사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처벌(punishment)은 공적이다. 국가만이 처벌을 독점한다. 국가만이 정의의 집행을 위해 처벌을 공적으로 독점하고 사용한다.
처벌은 범법자로 하여금 그가 파괴시킨 공적 권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내려지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한다. 법은 종이호랑이나 솜방망이가 아니다. 법이 범법자를 처벌해야만 하는 것은 법이 법을 통해서 그 안에서 질서와 안정감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지연된 유토피아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로 인간의 삶에서 폭력과 억압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한나 아렌트)
모든 부당한 지배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지배 자체를 확립하는 것은 인간이 정의사회를 실현해야만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정의의 실현만이 전쟁과 테러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
14-3
너희들은 너희들이 시작한 그곳에서 머무를 뿐이다. (휠더린)
경계를 넘고 나서야 우리는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물레 방적기는 중세인들을 조건 지웠다. 증기기관은 근대를 한정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나노, 유전 공학, 로봇, 인공 지능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현대 의학이 에이즈를 원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에서 우리는 의학이 한계를 지닌다고 말해야 한다. 매독은 한 때 불치병으로 분류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코로나 19는 현대의 우리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아직 이 문제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소진점(vanishing point)
지평(Horizon)이란 우리가 직면하는 그때 그때의 시야의 한계다. 하지만 이 한계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한계는 극복된다. 하지만 새로운 제약이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한계를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극복 가능한 도전으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위기 시대의 인간의 근본 삶을 뜻한다. 뉴턴은 바닷가에서 조약동을 줍는 어린 아이에 스스로를 비유한다.
Constellation(입장들 간의 다원적 긴장)
우리 시대만큼 이렇게 치열하게 물어진 시대도 없었다. 하지만 빅데이터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은 역설이다.
생명을 놓고 벌이는 입장 차이들 간에는 수렴이나 합의가 없다. 입장들 간의 정당한 차이를 둘러싼 논쟁들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갈등 관계에 있다. 데리다는 이것을 지연으로 규정한다.
revolution(공전 방향이 바뀐 것 그래서 혁명의 의미로 정착)과 constellation(별들이 끊임없이 운동하지만 절대로 한 지점에서 만나지 않는 현상)은 현대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용어들이다.
전망주의
니체에 따르면 사실은 진위 여부만 확인하면 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사실이 누가 어떤 맥락과 관점에서 만들어졌는가를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모는 사실은 누구의 전망과 관점 아래서의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을 파헤치는 것을 고고학적 분석으로 규정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니체의 고고학과 계보학을 통해 아주 탁월한 현대성을 분석한다.
차이
키에르케고르는 주체성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에게로의 비약을 통해 자신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길을 간다.
니체는 주권적 삶을 제시한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공언한다. 그래서 그는 가치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초인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신에게로의 초월은 없다. 다만 대지에 충실하게 살면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니체는 무신론적 니힐리즘의 길을 간다.
위기의 내재화와 일상화
자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 가능성은 인간의 극복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위기에 직면해서 대비는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불가피하게 한다. 위기에 직면해서 위기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으로부터(원자력 발전, 지구 온난화, 화산 폭발, 쓰나미, 바이러스의 급습 등등) 피해를 최소한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위기에 대비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위기는 극복되면 기회로 다가온다. 하지만 위기가 극복된다는 필연은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학문의 구별
자연과학은 법칙을 통해 개별 현상들을 예측하고 설명한다. 신칸트학파는 이것을 법칙정립적 학문으로 규정한다.
역사는 개별성들의 향연만 가능하다. 역사는 법칙이 없기에 법칙을 적용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의 개별 현상들을 그 자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개별적인 것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공유하는 것이 해석의 보편성이 충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다. 신칸트학파는 이것을 개성기술적 이해로 규정한다.
진정성의 윤리와 책임 윤리의 구별
진정성의 윤리(Gesinnungsethik, authentic ethic)란 자신이 믿고 있는 절대적인 신념이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심정의 단순상과 고결함에 따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테러로 변질될 수 있다. 행위의 무제약적 자기 확신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것이 맹목성으로 번질 경우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 responsibility ethic)는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책임지면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행동은 의도의 순수함이나 고결함이 아니라 행위가 초래할 결과에 대해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요구한다.
유비: 신과 인간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과 인간은 그만큼 멀리 있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제기되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연되고 있다. 반성하는 판단력은 이 문제에 대해 해결할 것을 과제로 걸머지고 있다.
질문은 많지만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경합하는 가치들이 서로에 대해 권리 주장을 하면서 다원적으로 논쟁하는 시대에 있다. 현대성의 불투명성(시계 제로)과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다. 불안은 인간의 기본 정조이다. 공포가 극복되어도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불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에 직면한 우리 삶의 유한성을 직면하게 된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도 함께 자란다”(휠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