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고독사' 영상감상문
孤獨死.
그저 말 한마디 나눌 사람이 없었기에 외로이 독방에서 홀로 임종을 맞이하는, 언제 발견될지 모르는 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죽음, 그의 이름은 고독사다. 이는 어디 소설책의 모두가 조난하고 홀로 외딴 섬에 남겨지거나 아포칼립스 따위로 혼자 생존하게 된다는 등의 판타지 소설의 한 주제가 아니며, 나이, 성별 불문하고 어느 순간 눈앞으로 다가오는 일종의 ‘사회 현상’이다. 고독사와 관련해 EBS의 2~3인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취재단이 무연고 사망자들의 사망 전의 지인들, 가족관계 등을 되짚으며 찾아가고 인터뷰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상당히 많은 영감과 충격을 받았다. 다큐멘터리에는 전국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취재단이 등장한다. 무연고 사망자들의 주변 지인을 찾고 인터뷰를 하며 관련된 일화를 취재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인데, 취재단 중 한 팀이 지하철역을 올라가며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이 난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가 원래는 무슨 뜻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정 요건에 충족되는 사람이 (성이 김씨라던가) 너무 많아 그 중 한 명을 특정하기 어려울 때 쓰는 속담이지만 무연고 사망자들은 주변 지인들이 많아야 두세 명인점을 생각해보니 반어적인 의미로 다가왔고 신선하니 창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또, 그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앞으로의 여정이 험난할 것을 암시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이 장면을 보고 그제서야 자세를 제대로 고치고 영상에 임했다.
그들이 지하철역을 나서는 장면을 보니 예전에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역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지옥 같은 입시가 끝나고 처음 가보는 서울역이었기에 나에게는 다가오는 의미가 남달랐다. 약간의 해방감과 “내 스스로 이 먼 길을 왔다!” 같은 소소하지만 달콤한 희열이 손 끝에 맴돌 때쯤, 이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자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적잖은 설렘과 함께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켜며 밖으로 나서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희뿌연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과 비명 지르듯 목놓아 지르는 자동차 클랙션 소리, 개구리 알처럼 꽉 막힌 버스와 승용차들과 초록색 천막 아래 앉거나 누워있던 수많은 노숙자들이 나를 쳐다보던 싸늘한 시선이었다. 마치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저 어린 양을 보라!” 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늙은 중년의 시선에 적잖이 충격 받아 황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서울역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아직 켜져있던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은 그저 까만 바탕만을 렌즈에 담고 있었다. 앉아 있을 카페를 찾으려 주변을 돌아다니니 상상치도 못한 곳에 노숙자들이 자고 있어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이런 노숙자들이 고독사하면 과연 발견해줄 사람이 있을까?” 노숙자가 아프거나 힘들면 바로 119에 신고나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줄 사람이나 있을까? 기껏해야 갈 곳이 잠시 머물 복지센터나 무료 급식소일 텐데 말이다. 그때를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골판지를 이불 삼아 누워있을 ‘예비 무연고 사망자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몰려온다.
영상에서 취재팀은 노숙자 급식소, 거주자 주변이나 복지센터 등을 돌아다니며 무연고 사망자의 지인을 찾아보지만, 충격적이게도 그 사람들은 취재단을 통해 처음 고독사의 소식을 전해 듣는 상황이었다. 영상에는 총 이인수 씨, 김병철 씨 외의 총 6분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소식을 접한 각 지인은 다양한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무덤덤하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 이준용(남, 31세)의 사망소식을 듣는 지인 두리 씨의 반응이 너무 마음이 아프기에 기억에 남는다. 이준용 씨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가까이에는 아픔을 공유할 친구가 없었던 듯 보였다. 수화기 너머 두리 씨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슬픔을 참아보지만 결국 “나밖에 없었을 거 아니야!” 라고 흐느끼며 울부짖고 만다. 전화로 소식을 전하는 학생들은 이준용씨가 전화 통화를 끝내자 “진짜 마음 무겁다, 장난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나도 영상을 보는 내내 괜히 이준용 씨에게 힘이 못 되어 준 것 같아 불쾌한 부담감이 들었다.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부담감에 전화조차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실은 위처럼 가슴 아픈 우정의 사서 극이 자주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거나, 혹 죽었음을 알고서도 유품을 찾으러 오지 않는 메마른 사람들이 태반인 것을 생각하면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형편 좋은 부류이지 않은가? 라는 씁쓸한 푸념을 한다.
이때 내 안에서 무언가 참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나는 저러지 않겠지, 나는 힘들면 도움을 요청할 친구가 있겠지” 라고 애써 자위하며 필사적으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걱정과 약간의 두려움들이 나를 잠식했고, 혼자가 되어 버린 듯 공허함을 느껴버렸다.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뭐, 예를 들어 5명 이상인가? 혹은 무슨 근거로 우리가 언제까지 주변에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으며 지인이 있을 것이라 당부할 수 있는 것인가? 제3자의 처지에서 볼 때 “내가 죽었다”, “박인겸이 죽었다” 는 그저 이름 모를 사람의 죽음이겠지. 하지만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걱정하게 될 때는 아마 무연고 사망자의 주체가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음을 인지한 순간부터 이지 않나 하고 성찰했다.
특별히 오명희 (여, 40세) 씨의 고독사와 관련한 취재는 가슴 한쪽에 먹먹한 인상을 남겼다. 40이라는 어찌 보면 고독사하기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밟아왔던 삶의 발자국을 되짚어 보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집에는 여느 20대와 같이 친구들과 찍은, 샛푸른 청춘이 금새 배어 나올 법한 사진들이나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들이 꼽혀 있었고, 행복했던 삶의 흔적들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노트에 적힌 문장들을 보자마자 영상을 보던 내 표정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삶이 이런 거라면 살고 싶지 않다. 눈 감으면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삶”, “내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축복했을까?” 이는 그녀 나름의 세상을 향한 원망어린 몸부림과 절규, 혹은 자신에게 하는 자책이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아직 살고 싶다고, 하지만 내 안은 죽어 있다고.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고독사는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살이자 사고사라는 사실을.
고독사의 원인: 기술의 발전과 반비례하는 사람과의 관계
보통 우리가 고독사를 들을 때 연상하는 단어는 보통 아마 ‘홀몸노인’, ‘취약계층’, ‘장애인’ 등일 것이다. 다만 요즘 추세는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정보의 발전과 편의성의 혜택으로 인해 혼자 살아도 될 만큼 기술과 체계가 정착된 21세기에는 스마트폰으로 몇 번 터치만 하면 음식이 배달되고 상품이 배송되며 필요한 서비스를 부를 수도 있다. 이는 최근 들어 ‘혼’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단어들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 혼술, 혼밥) 그렇기에 혼자 사는, 이른바 혼족들이 늘어나고 결혼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드는 사회 분위기 또한 우리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러한 현상이 사회적 고립을 일으키고 고독사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었으면 한다. 꼭 고독사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과 오래된 친구를 만나며 느끼는 안정감 등 사회적 활동은 인간에게 있어 삶의 활력을 불어주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보의 발전으로 줄어든 인간관계의 대화의 장이 더욱 활발해져야 하지 않은가, 라는 고민도 해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은 아주 명백한 오류이다. 아마 누군가는 같잖게 코웃음을 쳐버릴 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디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인 동물로 설계되어 있는데, 굳이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대학생이 되고서 주변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고민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친구를 만들고 사귀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니 인간관계에서 너무나 많은 제약과 조건이 따르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서는 친구의 의미가 크지 않았다. 그냥 옆 친구, 단짝의 친구,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 학원 친구 등 친구가 되는 것의 특정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버린 지금 눈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에서 그들은 꺾고 넘어야 할 산이며 경쟁자이며, 도전자이다. 이율타산, 이득과 손해를 철저히 계산하여 손해볼 것 같으면 접근조차 하지 않는, 경계가 일상화되어버린 21세기의 본 모습이다. 인간관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부족이 아닌 무한한 경쟁사회와 차가운 인간관계가 만들어낸 현재의 사회구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린, 하지만 부끄럽게 치부되어 알려지지 않은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도의 발전사회가 만들어 낸 어두운 이면을 밝게 비추어줄 횃불 같은 존재가 나와주기를, 혹은 내가 그리 되기를. 영상 마지막의 한 대학생과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감상문을 끝마치도록 하겠다.
“요즘 친구들 만날 때마다 꼭 그렇게 말해요. 정말 힘들거나 필요할 때가 되면 나를 불러달라고.”
2020-05-11 1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