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수기
이제는 나도 원인을 찾고 싶다.
나는 왜 이런 사념을 자꾸 머릿속에 가진 채 살아가는 건가.
언젠가 자기혐오를 그만두고 정말로 나답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의 성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취지로 작성된 글임을 먼저 밝힌다.
나의 성격은 남들보다 현저히 안정적임에 그 장점을 가진다.
감정의 발화점이 남들보다 현저히 높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 쉽게 화내지 않는다.
무언가의 잡음이 생긴다면 그 책임의 소재와 잘못을 바로잡는 방법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에 자아 성찰과 반성의 습관이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검열행위의 원동력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존재한다. 나를 나쁘게, 안 좋게 바라보는 하찮은 경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서 받아들이기가 죽을 만큼 아파서, 그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남에게 보일 모습, 말투, 비언어적 의사전달 등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일종의 평가로써 인식하다 보니 어느샌가 내 삶의 중심은 자가 아닌 타가 되고야 말았다. 남들에게 보여질 1초를 위해 내 10초를 희생한다.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그 이타에는 선의가 담겨있다기엔 자못 자발적인 의무적 성질이 묻어난다. 쉽게말해 착한 아이 증후군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나는 모두에게 비록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무시당하거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조소를 날리는 구역질 나는 얼굴을 빳빳히 치켜세운 채 나와 대면하지는 않기를 소박하게나마 바랄 뿐이다. 그 시선을 견뎌내는 용기와 의지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정말로 고맙겠으나 신은 나약한 인간이 마음의 기댈 곳을 찾아 만든 가상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다. 신은 인간의 탄생 그 이후에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가령 100명의 구성원 중 나를 싫어하는 이가 5명정도 있다고 쳐보자. 95%의 월등한 비율에 초점이 가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 5%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을 나 자신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찾아 나선다. 불필요하게 모두에게 사랑받으려 하는 불쌍한 어린이가 돼버린다. 나 자신의 주관적인 시선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 즉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과 평가에 매달리게 된 것 같다. 그로부터 인정받으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물론 알고는 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으며, 나의 편에 서주는 사람들만 챙기며 살아가면 된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취향과 개성에 맞는 틀을 가지고 있으며 각 구성원은 이러한 틀에 맞을 수도 있고, 모서리 한 부분조차 끼우기 버거운 사람도 있을 것이며, 기적적으로 목제품 안 마냥 꼭 들어맞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모두의 신임을 받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론 "그래도"라는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선망받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부류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특성이 있고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면 나도 언젠가 이상향이라는 곳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많이 웃는다, 올바른 말투와 언행을 사용한다, 화내지 않는다, 용서할 줄 안다, 기본적인 예의가 바르다, 이타적이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자아 성찰을 자주 한다, 단정함(품행, 외적품위, 글씨체 등)을 추구한다, 상식과 유행을 겸비해야 하며 적절한 말주변을 가지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따라 하고 닮아가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래서 완벽주의를 배워 가려 하고, 완벽주의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하면 무엇이 바뀌고, 현재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무것도. 누구보다 용맹하고 자신 있게 얼굴을 들어 상대방과 마주해야 할 자존감이 바닥을 쳐 그저 생판 모르는 남의 싸늘한 평가에 의지해야 겨우 고개라도 빼꼼 내밀어 비굴하게 죄지은 사람처럼 스스로 낮은 자를 자처하는 이런 나의 뒷모습은 얼마나 쓸쓸한가, 외로운가, 초라한가, 한심한가. 생각이 많아질수록 본인의 모난 부분밖에 보이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며 완벽함에 가까이 가고자 하지만 실상 완벽은커녕 남들의 지적조차도 지나치게 의식하는 부끄럼쟁이이다. 22년 살면서 자책하지 않아도 됨을 선임에게 혼나면서 배웠다. 스스로 빛나는 순간에 불현듯 깨우친 것도 아닌 그저 패배자에게 건네는 무심한 위로 아닌 위로, 그 무심코 넘겨받은 한 마디의 문장에서 나는 빛을 보았다. 쓰레기더미에서 광명을 찾아낸 느낌이라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럴 거면 혼내지 말고 차근차근 알려주면 됐을 것을. 그런 상황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나는 본인의 가치를 스스로 재평가하여 재평가받은 기분이었다. 나도 그럭저럭 쓸만한가? 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결론적으로 굉장히 타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지배받는 꼭두각시라는 느낌을 크게 받는다. 그러면서 타인에게서는 배울 점만을 찾다 보니 항상 타인은 나보다는 나은 사람, 이라는 인식과 선입견을 품는다. 그러면서 내 본연의 가치는 평가절하당하게 되는 불행한 순환구조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반복돼 온 것이다. 항상 평가받는 것에 있어 준비 자세를 취한다. 이는 곧 언제나 상대방이 볼 때 만족스럽게 보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필두로 세우는데, 이 명제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나는 언제나 내가 감시받고 있다는 가정 속 상황을 항상 구성한다. TV에 나오는 출연자들이 도덕적으로 불순한 태도와 행위를 보이는 경우는 그다지 많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선행을 실천하거나 남들이 보지 않더라도 사회에 도움 되게끔 배려와 봉사를 하는 것도 나 자신의 순전한 이익에 어쩌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