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고전] 중간고사 정리

1-2: 철학의 어원
그리스어 철학은 Phil(Love)+Sophia(Wisdom)의 합성어다. 이것은 직역하면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철학을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철학에 대해 약간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철학은 학문과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현대는 검증 가능한 것만 진리로 여긴다. 그래서 철학(특히 형이상학)은 검증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은 학문과 같이 엄격한 증명 방식을 갖추지 못한다고 비판된다. 오스트리아 빈 학파는 철학의 이름으로 철학을 무의미한 주장이라 단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단지 비판의 길만이 열려 있다” 칸트
“진리는 비판받기를 원하지 결코 우상화 되어서는 안된다” 니체
고전의 의미
고전이란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가 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골동품에 어울린다. 고전이란 오래전에 쓴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생생하게 대화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되는 것은 그 고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을 건네고 우리와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항상 우리가 근거를 제시하는 것(logon Didonai = giving a justification)에 기초한다.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우리에게 여전히 우리는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을 훈련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로부터 로고스로의 이동은 학문이 세계관이 아니라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관점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에 의해 그 타당성이 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타당하다.
믿음과 함께, 그러나 믿음에 거역해서
우리 모두는 항상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이미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믿음이 옳은 것이든 틀린 것이든 우리는 항상 믿음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플라톤은 이것을 동굴에 비유한다.
사고의 본성은 대화이다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로 참인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단언해서는 절대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참이라고 밝혀진 것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이 기준에 일치하는 지를 계속해서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로 참인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dis+cure, belief<->true belief)대화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란 참과 거짓 사이의 지속적인 검증이다. 참이란 검증된 것이다. 이에 반해 참에 대한 믿음은 검증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 참에 일치하는 지 일치하지 않는 지를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바로 대화의 본질이다. 우리는 참을 통해 우리 믿음의 그릇된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철학은 뿌리에서부터 문제를 차근차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오늘 날 이해하고 있는 radical은 사실 그리스에서는 모든 것을 뿌리에서부터 검증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검증을 거부하는 것은 철학의 자격이 없다. 철학은 뿌리에서부터 모든 것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현상을 구원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스어 Radical은 뿌리에서부터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 급진적으로 이해하고 지만 이 말은 본래가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말한다. 철학은 문제를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
독단과 회의의 피안에서
독단(dogma)이란 제기된 주장에 대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독재적 발상이다. 따라서 거부되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는 말한다.
비판(krinein, unterscheidung)이란 무엇의 한계를설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계를 통해 한계를 부단히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 검증을 통과한 것 만이 진리로 인정된다. 진리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폐지되어야 한다.비판은 비난과 구별된다. 비난은 욕하는 것이지만 비판은 한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한계를 보여주는 자 만이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다.
경이로움(thaumazein)과 의심의 정당성
“철학은 경이감(taumazein)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의심할 수 없을 때 까지 의심하라”, 데카르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새롭게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어 skeptikos는 무엇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리스어로 epoche는 판단중지를 뜻한다. 우리는 판단중지하고 무엇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 까지 의심해야 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의심의 정당성은 모든 제기된 주장을 검증하는 데 있다. 우리는 검증을 통과한 것만을 진리로 여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서의 의심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은 무엇인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가 의심하는 대상에 대해 비판적 검증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사 2500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우리는 이들 중에서 우리에게 지금도 말을 걸고 우리와 생생하게대화하는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은 비판받기를 원하지 결코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선생을 만나면 선생을 죽여라” 살불살생의 요구가 있다.
비판(krinein)이란 그리스어로 무엇을 채로 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무엇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한계를 뛰어넘는 것(beyond limit)이 가능하다. 모르면 ㅍ비판할 수 없다. 비판은 발전적이다. 비판은 상대방이 파악하지 못하거나 간과한 것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비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의 한계를 먼저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보충하고 완성하고 넘어서는 작업이다.
비난(reprimand)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타인을 비방하는 것이다. 비난은 몰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비난은 발전이 없다. 비난과 냉소는 자기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질병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감옥에 갇힌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활동으로 본다. 우리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짋명으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의 자기 치료이다.
인간은 자기 구원과 자기 파괴의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인간은 판단하고 추론한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오류와 가상 그리고 거짓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우리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서 오류와 가상 그리고 거짓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철학의 자기 치료이다. 거짓과 오류와 싸우는 것도 자기 해방의 과정이다.
이번 한 학기는 철학의 고전을 통해서 인간이 철학을 통해 무엇을 추구해 왔고 무엇을 알고자 했으며 무엇을 희망해 왔는 가를 철학의 근본문제들을 검토함으로써 철학의 고전을 제대로 알아듣는 훈련을 할 것이다. 릴케의 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누가 승리를 말한단 말인가? 인내가 전부인 것을!”
“Wer spricht von Siegen? Uberstehen ist alles.”
1-3: 경이감 (thaumazein)
“경이로움은 철학의 출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본성상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나는 남들보다 똑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호기심이 더 많았을 뿐이다. “아인슈타인”
왜 그런 것인가? 우리는 이 점에서 궁금한 것을 해명하고자 한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활동이 인간이 철학하고 있다.
검증의 철저함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살불살생: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선생을 만나면 선생을 죽여라
판단중지(epoche) “의심할 수 없을 때 까지 의심해라” 데카르트
근거 제시 능력(logon didonai)
왜 꼭 그래야만 하고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제기된 의문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려는 훈련을 해야 한다.
Logon didonai = giving a justification = burden of proof = burden of justification
“진리는 비판받기를 바라지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
독단, 회의, 비판
독단적(dogmatic): 주장만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회의적(skeptical): 판단중지한다. 의심할 수 없을 때 까지 의심하라.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의심이어야 한다. 의심의 비생산성이 아니라 의심이 생산적이어야 한다.
비판적(critical): 한계를 제시하면서 한계를 뛰어넘는다. (limit and beyond limit)
비난과 비판은 서로 다르다
비판(critique): 모르면 비판할 수 없다.
비난(reprimand): 몰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치는 맹목적일수록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파괴했고 타인을 동시에 파괴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판단의 오류 가능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반박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 상수를 제시했다. 하지만 우주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인류는 아직 까지 아무도 이 우주 팽창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로써 진리에 참가한다.
학문의 특징
수학과 논리는 필연을 다룬다. 수학과 논리는 논증하는 것이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가설을 제시하고 이 가설이 공적 검증을 통과하고 잇는지 아니면 통과하지 못하는 가를 검증한다. 과학과 수학은 구별된다.
철학은 그 주장에 대해 반드시 그 주장이 타당하다는 입증책임 (burden of justification)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은 독단에 빠진다.
개방적 대화
윤리 정치 역사 사회학 심리학 예술 미학 등등은 거의 대개가 논쟁적이다.
이런 학문들은 질문이 많이 제기되지만 이 질문에 대해 반드시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해답의 가능성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들이 제기된다.학문은 이 점에서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괴물과 싸우는 너는 괴물이 되지 말아라” 니체
2-1: 소크라테스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소크라테스는 자기 삶에 대해 검증하고 자기 삶에 대해 진정한 의미에서 주인답게 살 것을 요구한다. 스토아 학파는 이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현대의 키에르케고어도 “주체성이 진리다” 라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 수용한다.
상반된 평가
부정적 평가: 크세노폰과 니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묻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삶을 너무 이성화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축소시켰다고 비판한다.
긍정적 평가: 헤겔, 러셀, 키에르케고어
헤겔은 니체가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것을 통해 학문적 태도를 제시했다고 본다.
소피스트들과의 싸움
소피스트: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Homo mensura)
소크라테스: 나는 양심의 소리와 명령 그리고 진리를 따르고 추구할 것이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고 따를 뿐이지 내가 진리의 기준은 아니다.
Daimonia: 나는 내면 안에서 어떻게 살라고 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논박술(elenchus)
소크라테스는 누가 어떤 주장을 하면 이 주장이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이 주장을 판단중지 (epoche) 시킨다. 주장이 검증될 떄 까지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주장을 반성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Skeptikos(sceptiacal): 무엇을 뚫어지게 본다, 무엇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심할 수 없을 때 까지 의심해라”
주장과 반대 주장
모든 논쟁(discussion)은 어떤 특정한 테마들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지니는 자들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주장하는 자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는 가에 대해 입증책임(burden of proof, burden of justification)을 진다.
학문은 바로 입증책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세를 입증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에 둔다.
고립을 넘어서 대화로
소크라테스는 책을 저술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25개의 저서에서 무려 23권에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킨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독백(monologue)이 아니라 대화(dialectic)로 풀어간다. 서로 입장들이 다른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 논쟁의 목적이다. 타인을 설득하는 이런 포괄적인 대화기법이 바로 변증론이다.
오류 가능성
소크라테스: 내 주장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나는 내 주장에 대해 이것이 모든 비판과 오류로부터 면제되거나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내 주장이 틀리거나 오류로 드러나면 이것을 수정하고 고쳐 나간다. 나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따를 뿐이다.
“진리는 비판받기를 원하지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
The knowing of the unknown (무지를 앎)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절대화 하지 않는다. 무릇 못하는 것이다. 나는 오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따라서 나는 진리 자체가 아니다. 나는 단지 진리를 찾고 추구하고 따를 뿐이다.
내 주장과 진리는 다르다
나는 내 주장을 철저하게 검증한다. 나는 내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철저하게 검증할 뿐이다.
Radical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검토하는 것): 대충대충이 아니다.
Radical (철저함)과 Extreme (극단적)은 다른 개념
Krinein (Critique): ~를 채로 친다, 걸러낸다. 참과 거짓을 분리하는 작업
Limit and beyond Limit: 한계를 드러내고 한계를 뛰어넘는다.
너 자신을 알라!
1. 너는 신이 아니다
2.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이다.
3. 너는 너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쿠자노스: Docta ignorantia(무지의 학습)
2-2: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태도
소크라테스는 자연 철학에서나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방향을 전환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영역을 매우 축소시켰고 삶을 주지주의화 했다고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신화(mythos)로부터 벗어나서 Logos(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학문으로 규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대결했다.
관점의 차이
Homo mensura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전술에 불과하다
참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합리적이고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논쟁의 목적이다. 논쟁은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 논쟁은 진실에 다가가는 노력이다.
논쟁의 구조
1. 어떤 특정한 주제들에 대해 논쟁한다. 쟁점이 되는 Theme들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2.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나뉘어 진다. (Pro versus contra, for <-> against)
3.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논쟁한다. 이것이 논쟁의 목적이다.
4. 설득이 반드시 된다는 보장이 없다.
설득이나 합의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논쟁을 통해 상호 이해에 도달하면 논쟁은 무익한 것 만은 아니다.
차이
소피스트들은 논쟁에서 항상 자신들이 타인들을 가르치거나 지배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난점에 빠진다. 소피스트의 앎은 무지로 귀결될 때가 종종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무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근거 제시에 있어서 불충분하거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통해 무지를 극복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무지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전개된다. 무지의 자각은 발전적이다.
법정싸움
1.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
- 나는 마음속의 신을 믿는다(Daimonia). 나는 신이 경건하다고 믿는다.
2.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아테네의 풍습을 파괴한다.
- 나는 누가 덕이 있고 누가 덕이 없는 지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친다.
젊은이들은 충동적이고 즉흥적일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미성숙함과 감정을 통제하는 훈련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리스의 노인네들 중에서 누가 덕이 있어서 본받을 만한지 그리고 누가 덕이 없어서 멀리해야 할지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분별력을 가르쳤다.
성숙하고 현명하게 멘토를 해줄 수 있는 노인네들과 힘과 권위주의로 인해 독선을 행하는 늙은이를 구별하는 것인 진정 지혜의 시작이다.
성공적인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형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고발에 대해 아주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법정은 표결에 붙인다. 결과 사형에 19표가 더 많아 사형을 한다. 여기서 민주정치가 다수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제기되었다. 플라톤은 바로 이것에 분노한다.
사람들이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문제인지 표결하는 사람들의 쪽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정치도 타락하면 중우정치가 된다.
소피스트들은 표대결에 있어서는 이겼지만 진실에 있어서는 패배했다.
진리와 다수결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독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힘이 진리는 아니다. 판단력 없는 다수는 진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했지만 표대결에서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진실이 법정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판단력의 소유자들이 많아야 한다.
Authentic life (진정성의 삶)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민주정치는 타락하면 중우정치가 된다. 니체는 민주정치의 타락을 가축들의 무리라고 비판한다. 대중은 진리가 아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늘 신의 음성을 들었고 이것에 다라 행동하려 했다. 나는 늘 나를 검증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판단력(Power of judgement)을 늘 참과 진실을 위해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남겨진 과제
“:아버지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 지 모르옵니다!”
빌라도: 내가 이 죄인(예수님)을 심판했는데 도대체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저 죄인을 죽이라고 고함친다.
빌라도: 저들이 너를 죽이라고 하기에 나도 너를 사형시킨다.
현명한 다수와 폭력적인 다수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다 오류를 저지르고 잘못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2-3: 논박술(elenchus)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묻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묻고 대답하는 대화, 즉 변증론을 논박술과 연관시켰다.
플라톤은 변증법을 진리 발견에 대한 최고의 한문으로 여긴다. 헤겔은 변증법을 철학적 체계로 집대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
수학은 증명한다. 수학은 대화하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필연을 다룬다.
논리는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다룬다. 논리적 논증은 논쟁과 다르다.
논쟁은 어떤 테마들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른 자들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권리싸움을 하는 것이다.
논쟁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반드시 설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분석론(analytic)과 변증론(dialectic)의 차이
분석론의 대상은 수학과 논리학이다. 수학은 공리로부터 정리가 100%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논리적 논증은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변증론은 어떤 테마들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른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해서 설득을 제시하는 것이다. 논쟁에서 설득이 반드시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론이 분석론에 비해 엄격성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차이
2+3-5이다. 이것은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하다. 이것은 런던에서도 충주에서도 맥시코시티에서도 항상 성립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강제를 행사한다. 수학과 논리는 문제를 풀도록 강제된다. 못 풀면 0점이다.
전 세계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된 국가는 22개국 정도이다. 누구는 동성애를 비판하고 또 다른 누구는 동성애를 지지한다. 이들이 서로 논쟁하면 반드시 결론이 나오고 서로 설득하고 합의가 도출되는 것인가?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논쟁할수록 차이를 더 확인하게 된다.
플라톤의 25권의 저서들 중에서 23권의 저서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킨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의 논쟁에서 항상 승자로 논의한다. 하지만 현실의 대화에서 논쟁 당사자들이 합의에 도달하거나 설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대화의 목적은 합의(consensus)에 있다”, 하버마스
나의 반론: 대화의 목적은 상호이해에 있다.
긴장관계
소크라테스,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학문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변증론은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다룬다.
“사고의 본성이 변증법적이다”, 헤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는 변증론을 분석론에 비하여 엄밀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변증론은 한 주제에 대해 서로 입장들이 다른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논박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반드시 승리하거나 합의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맞지 않다.
13세기 영혼논쟁
중세에는 13세기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영혼에 대해 논쟁한다. 플라톤은 영혼의 선재와 불멸을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선재를 부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죽고 나서 육체의 부활 가능성에 대해 그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영혼선재설을 부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죽고 나서 영혼이 활동하려면 육체가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도 교는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 이들이 대화한다고 해서 논쟁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13세기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강의가 열릴 때도 있었고 폐강될 수도 있었던 이유다. 결국 주교의 개인적인 차이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는 열리고 폐강되기도 했다.
괴물과 싸우는 너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니체
Different is different as wrong.
틀린 논쟁은 없다. 하지만 다른 논쟁은 있다.
다른 논증은 없다. 하지만 틀린 논증은 있다.
수학과 논리는 싸우지 않는다. 논증은 논쟁과 구별된다. 논증은 100% 확실한 필연을 다룬다. 논쟁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권리싸움이다. 상대방이 반드시 설득된다는 보장은 없다.
설득하려는 무제약적 호소
체엄벌린(영국의 수상), 달리디에(프랑스 수상), 히틀러(독일 꼴통), 무솔리니는 1938년 뮌헨에서 협정을 하고 합의한다. 하지만 1년 뒤에 유럽은 전쟁을 하기 시작한다. 합의했다고해서 진실이나 진리를 공유한 것도아니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대화가 실패한 것도 아니다. 현실의 논쟁에서 광연 누가 누구를 설득하는 것이 가능한가? 합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호 이해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때가 있다. 변증론, 논박술, 선득술은 그렇게 엄밀한 학문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합리적인 논거를 제기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열린자세
칸트는 나의 입장에서 너의 것을 생각해보고 너의 입장에서 나의 것을 생각하는 교차 검증이 요구된다고 호소한다. 우리는 우리의 대화를 개방하고 서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호소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화이부동: 화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똑같을 필요는 없다.
화쟁론: 싸우기는 하되 화해도 해보아라.
3-1: 플라톤의 문제의식
플라톤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에서 변화하지 않고 부동인 것을 추구했다.
헤라클레이토스: “모든 것은 변화한다” (Panta rei, All flows)
파르메니토스: 존재는 불변이다.
플라톤은 변화하고 생성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이 변화와 생성의 이면에 있는 불변하는 것을 찾고 추구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25권의 저서를 남긴다. 이 중에서 23권의 저서에는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플라톤은 만년의 저서 “소피스트”에서 소피스트의 근본 주장을 비판적으로 대결한다.
소피스트: Homo mensura,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
플라톤: 참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소피스트들과의 대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틀과의 대결에서 Arete(덕, Virtue)를 통해서 Technee를 극복하고자 했다. 덕을 통해 테크네를 극복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근본 중요성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과의 대결에서 참을 통해 Homo mensura를 극복하고자 했다.
참을 통해 현상을 근거 있게 설명하는 것을 플라톤은 현상의 구제로 전개한다.
이데아(Idea) = 참으로 (Really Real)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화이트헤드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것의 의미는 초기, 중기, 후기로 가면서 조금씩 변한다. 표현은 같지만 영국 경험론이 말하는 Idea는 우리 주관 안에서의 상들을 말한다. 이에 반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Idea)는 참으로 있는 것 (Ontos on, Really Real)을 뜻한다. 이 차이를 잘 구별해야 한다.
동굴에 비유
그리스어로 Doxa=Take it for granted that을 뜻한다.
우리는 대개 그리고 아무 의심 없이 어떤 것을 매우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 모두는 다 Doxa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독사는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플라톤은 Doxa가 진리가 아니라 정당화된 참된 독사(The justified true belief)가 진리라고 규정한다.
독사의 검증(The verification of belief)
틀린 독사: 지구는 평평하다. 태양이 지구를 공전한다.
올바른 독사(Ortho dox): 지구는 둥글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
우리의 믿음이나 독사는 틀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임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독사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하고 살아야 한다.
Ortho (Right) + Doxa
변증론 (with Doxa and against Doxa)
우리는 우리의 독사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
독사가 진리인지, 독사가 진리가 아닌지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독사나 판단 그리고 주장들은 오류나 가상 그리고 비진리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독사, 판단, 주장을 진리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참의 기준에서 우리의 판단과 독사를 검증해야 한다.
변증론(Dialectic = 대화)
Doxa <-> Really Real
Really Real을 통해 Doxa의 비진리, 가상, 오류를 극복하는 것이 철학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현상을 구제한다고 말한다. Really Real을 통해서 Doxa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현상의 구제로서의 철학이다.
Really Real (Criteria)를 통해서 독사의 비진리를 극복하는 것이 어두운 동굴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뜻한다
변증론은 계속해서 독사와 참을 교차 검증함으로써 독사를 진리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손을 들어서 하늘을 가리킨다. 플라톤이 가리키는 손의 방향은 허공이 아니라 진리다. 진리를 통해서 비진리, 가상, 오류,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철학의 자기 구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철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따른다. 플라톤은 이 궁극적인 거시을 진리에 대한 인간의 참여라고 말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는 비판받기를 원하지 우상화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니체
열망의 철학( The philosophy of Aspiration)
Idea = Ontos on = Really Real = Ultimate Criteria
이데아 = 참으로 = 진리의 기준
우리가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고 실현한다. 인간은 진리에 참여하는 것만큼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간다. 철학은 진리에의 참여이다.
3-2 본다는 것의 두 가지 의미
눈 속의 눈(Eye is Eye)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 말고 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를 보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눈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통해 무엇인가는 볼 수 는 있다.
“눈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눈은 세계의 한계다” 비트겐슈타인
누구도 신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신을 통해 무엇인가를 볼 수는 있다.
차이
오디세이는 자신의 부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오디세이는 자신의 부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 하지만 왜 자기 부인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본 것은 아니다.
대상을 직접 보는 것과 대상을 파악하는 것의 차이
나는 삼각형을 눈으로 보았다. 삼각형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직접 대상이다. 이것은 직접 관찰의 대상이다.
삼각형이 성립하려면 두 변을 더한 합이 한 변보다 반드시 커야 한다. 그리고 세 각의 크기가 반드시 180도여야 한다. 이것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이 성립하는 조건이다.
A+B=C, A+B+C=180도
우리는 이것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에 도형을 삼각형으로 알 수 있다.
봄의 두 차이
Seeing by Sensation: 우리는 원자를 직접 관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원자의 구조를 볼 수 없나?
Seeing by Nous (Reason): 우리는 원자의 구조를 알려면 입자 가속기 안에서 두 소립자를 충돌 시켜야 한다. 이 충돌의 결과 우리는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로 결합되어 있고 바깥 궤도에 전자가 운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알 수 있다.
생명의 신비
우리는 갓 태어난 아기를 본다. 이것은 직접 관찰의 대상이다.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 수정, 착상, 세포, 조직, 기관의 형성, 출생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생명이 탄생하는 복잡한 과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직접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태어난 생명체를 본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 과는 다르다.
이데아는 직접 볼 수 없다. 이데아는 직접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든지 신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신을 통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데아를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다. 이데아는 관찰의 가능 조건이다.
플라톤은 감각이 아니라 이데아에 따라 감각을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현대적 변형
현대 자연과학도 자연파악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관찰과 실험은 이론에 의해 인도(Theory-laden)된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그 사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이유 내지 원인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참된 역사가는 사실의 수집가가 아니라 사실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자이다.
From Sensation To Reason (감각을 넘어 이성으로)
철학은 참을 보려는 훈련이다. 참은 직접 관찰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우리에게 대상을 보려고 하지 말고 대상을 대상이게 해주는 바로 참의 조건을 보라고 호소한다. 플라톤은 감각이나 현상을 경멸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핵심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철학은 참된 것을 파악하고 보려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이성의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Arche (Ground)
철학은 근거(arche, ground, principle)을 찾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 근거는 눈으로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 근거나 원리를 파악함으로써만 보다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근거나 원리에 대한 파악은 감각적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원리나 근거를 제대로 보려는 사고 훈련을 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
힘이 지배한다. 원리나 근거를 아는 자들이 지배한다.
이데아를 참으로 파악한 자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는 자이다. 우리 모두는 동굴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있는 것을 보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궁극적인 것을 파악하기
플라톤은 감각과 현상 세계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라톤이 보기에 궁극적인 것은 우리가 직접 관찰하는 감각 대상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참으로 있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데 있다. 이데아에 대한 파악은 감각을 초월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감각을 뛰어 넘어 있는 것을 제대로 파악할 떄 한해서 우리는 감각 세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보았다는 것”과 “무엇을 진정 파악하면서 보았다”는 것은 다르다.
“나는 Paris를 보았다”와 “나는 Paris를 음미하면서 충분히 보았다”는 다르다. 우리는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은 제대로 보려는 훈련이다.
3-3 플라톤과의 비판적 대결 / 아름다움
Phaedros
“정의와 자기 절제, 그리고 영혼에게 귀중한 다른 모든 형태들의 가시적 모사물들은 전혀 광채를 발휘하지 않으며, 자신의 연약한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큰 곤란을 무릅쓰면서까지 모조품들에게서 원본들과의 친족 유사성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때 미는 그 모든 광채를 통해 볼 수 있는 우리의 것이었다. 미는 천상의 세계에서 밝게 빛나며, 여기에서도 여전히 가장 밝게 빛난다.
미의 객관성에 대한 요구
“뮤즈 여신에게 봉사하면 결국 미를 사랑하게 된다”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름답다”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이외에 예술작품들에게 더 바랄 것은 없을 것이다.”
“미는 이데아의 완전성에 대한 조화로운 참이다” 플라톤
“예술은 자연의 완전성을 모방(mimesis)한다.” 아리스토텔레스
Mimesis (re-enactment) is not copy
논쟁들
플라톤은 Politeia에서 예술을 진리에 종속 시킨다. 그렇기 떄문에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진리에 종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시켜서 추구하는 것을 비판한다. 시인과 예술가들은 참을 따르지 않고 단지 그럴듯함과 효과만을 추구한다. 이들은 이데아의 참이 아니라 그림자나 효과만을 추구한다. 따라서 추방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최초의 예술 검열관이다.
칸트는 미가 진리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는 진리 판단이 아니라 취미 판단에 속한다.
니체는 플라톤이 예술을 진리에 종속 시킴으로써 예술의 다양성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예술은 삶의 광학이다”
쟁점들
플라톤은 미의 객관적 규정들이나 기준들을 제시한다. 황금비례를 준수할 때만 회화나 조각 그리고 건물은 아름답다.
르네상스 미학은 플라톤을 다시 받아들인다.
영국 경험론은 아름다움은 단지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들의 주관적 즐거움과 관련된다고 한다. 이들은 취미를 강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는 주관적인 취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객관적 강제를 거부한다.
칸트의 입장
미는 주관적 취미와 연관 되어있다. 취미는 강제될 수 없다. 하지만 미는 주관적 취미를 토대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관적 취미를 모두에게 타당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보편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칸트는 주관적 보편화가능 능력을 공통감각(Sensus communis, the subjective universalization)으로 논의한다.
미는 진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는 단지 주관적 취미로 전락하지 않는다. 미는 주관적 취미를 보편화 할 수 있는 개방된 능력에 의해 그 타당성이 평가된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미학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선한 것은 때로 아름다운 것과 같다. 반대로 아름다움 역시 선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의 언어감각과 표현에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자연적 의미 뿐 만 아니라 도덕적 의미에 대해서도 가장 훌륭하고 조화로운 호소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눈과 귀를 가장 완전한 퇴고의 즐거움을 전해줌으로써, 영혼의 도덕적 탁월성인 우아함을 영혼에 불어 넣어 영혼을 감동시키는 힘들 발산한다. 미를 통해 우리의 조야한 영혼이 세련 되어지고 품위를 더해감을 느낀다. 미를 통한 구원 가능성 때문에 미적 교육이 필요하다. 르네상스는 이것을 다시 발견했고 이 점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 냈다.
아름다움과 선함의 이상이 융합된 것이 그리스 예술의 핵심이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통해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한다고 보았다. 비록 쾌락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적인 측면을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그 목적은 쾌락 뿐 만 아니라 덕의 고양에 있었다. 그리스 예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성과 인간이상의 표현에 있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여신 아테네를 경배하는 중심인 동시에 여신 아테네가 주관하는 공동체적 삶의 상징이다. 실제로 조각은 종교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으며 종교를 통해 국가생활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리스인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쇠는 선함과 아름다움의 동일하에 있다. 예술과 행위는 하나의 절박한 충동, 즉 선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조화와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절박한 충동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스인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통일성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점에서 그리스인들의 뛰어난 활동 가운데 예술 활동보다 중요하고 독창적인 것은 없다. 예술 활동의 본질은 하나 속에서 많은 것을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며 외면적인 것 속에서 내면적인 것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음악은 그리스 교육의 중심이었다. 올바른 성품은 영혼의 다양한 요소들이 올바른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스 연극은 음악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페라에 가깝다.
덕은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데 있으며 올바른 감정 속에 기쁨이 포함되었다. 덕과 아름다움은 같다. 선함과 아름다움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품었던 이상은 바로 선과 덕의 같음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특히 조각 예술에 있어서 타인들을 능가했다. 그들은 조각을 통해 인간을 형상화 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화하고 있다. 조화, 비례, 대칭, 균형, 황금분할에 의한 조각상들은 우리에게 매우 감동을 준다. 인간의 탁월성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그리스 예술이 추구한 것들이다.
빙켈만: 위대한 고요와 고결한 단순성
4-1 덕, 지식, 행복 아리스토텔레스
Eudamonia (Thefulfilled life, the accomplished life)
그리스어로 Hou heneka는 우리 행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말한다.
Hou Henka = for the sake of ~ = Ultimate End
“인간은 본성상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궁극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은 심리학적 의미가 아니다. 행복은 되고자 하는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오는 적극적인 즐거움을 말한다. 인간 본성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행복의 실현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다.
The realization of Ultimate end (궁극목적의 실현 = 행복)
여기서 궁극적인 것의 실현과 시간의 끝은 구별된다.
수단과 목적의 차이
수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수단은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그 유용성, 적합성, 도구성, 기여에 따라 선택된다.
칼은 과일을 깎는데 유용하다. 원자력은 전기를 생산하는 데 적합하고 효율적이다.
Prohairesis = Prefer = 가장 앞에다 갖다 놓는다
목적은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있다. 다만 목적은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을 뿐이다.
수단의 선택
오징어를 잡기 위해서는 불빛으로 오징어를 유혹해야 한다. 백열등(50), LED(75), OLED(100)을 잡을 수 있따. 우리는 이 3개의 수단들 중에서 OLED를 맨 앞에다 끌어다 놓는다. 왜? OLED를 통해서 가장 많은 오징어를 잡기 떄문이다. 수단은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그 적합성과 유용성에 따라 선택된다.
Telos (Entelecheia)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그것의 완성을 위해서 활동하고 움직인다. 도토리는 도토리가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상수리 나무)를 위해서 활동하고 움직인다. 달걀은 닭이 되고자 한다. 부화한 연어알은 성체 연어가 되어서 다음 생과 세대를 위해 활동한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궁극목적 (hou Heneka)를 위해 움직인다.
“자연 안에서 헛되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edagogy (Paid + Agogia) 어린애 (싹, 가능성)을 끌고간다 (어디로: 완성으로) 한 어린애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실제로 완성하도록 이끌어주는 것
Education, Culture, Bildung
모든 운동과 활동은 목적을 따르고 목적은 완성을 따른다. 그래서 모든 활동과 운동은 완성을 따르고자 한다. 인간에게 완성은 바로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목적(행복)의 실현이다.
Arete와 Technee 의 차이
Arete goes with Excellent
Arete는 능력의 탁월함을 좋은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다.
Arete는 이 탁월함을 평생에 걸쳐서 갈고 닦는다.
Technee는 무엇을 잘 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Technee는 탁월함을 좋은 목적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쁜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덕은 인간의 제 2의 본성이다.
덕은 평생에 걸친 활동으로 얻어진다. 덕을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다.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여름이 왔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열정과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헤겔
적합한 수단과 좋은 목적: 코로나 19를 극복하기 위해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적합한 수단과 나쁜 목적: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 Zyklon Beta를 사용하였다.
부적합한 수단과 좋은 목적: 물에 빠진 자를 구하고자 했는 인공호흡을 잘못해서 죽이게 되었다.
부적합한 수단과 나쁜 목적: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집회를 열어서 집단 감염자를 증가시켰다.
“옳지 않은 일에 기초할 때 어떤 행복도 가짜다”, 아도르노
플라톤이 현상의 구원을 철학의 목적으로 제시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 목적을 실현하는 것을 철학의 즐거움으로 규정한다. 행복은 행운이 아니다. 행복은 인간이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궁극 목적을 실현할 때 이루어진다.
Dreams come true
Always do your Best
4-2 덕의 분류: 이론적 덕, 실천적 덕, 자기 통제의 덕
덕의 형성
덕은 능력의 탁월함(excellence)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의 탁월함을 개발해서 완성할 때 덕을 쌓는 것이다. 덕에 대한 지식이 인간을 덕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연습을 통해 우리는 덕을 쌓는다. 습관(習慣)에서 羽 + 百의 합성어이다. 새는 날기 위해서 백일 동안 나는 연습을 하기 때문에 잘 나는 것이다. 태어났다고 저절로 잘 나는 것이 아니다. Habitus, Habit
Ethic(윤리)는 ethos에서 유래한다. 에토스는 행위를 통한 자기 증명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의 행동을 통해 증명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탁월함은 크게 보아서 다음 3가지로 분류된다.
1) 이론적(지식) 탁월함: 원리나 근거를 제대로 아는 자들이 이론적 지식의 탁월함을 지니게 된다.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아는 것 ≠ 근거를 제대로 아는 것, Radical (뿌리에서부터 철저하게) ≠ 극단적 (Extreme)
2) 성격의 탁월함 (phronesis, 실천적 탁월함): 주어진 상황(불투명, 복잡)에서 가장 잘 행동하는 활동이 바로 지혜로운 활동이다. 실천적 덕은 지혜롭게 생동하는 것이다. 이성의 합리적인 활동에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식처럼 엄격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가장 적합하고 잘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적 분별력을 요구한다. 모범사례 (Causa exemplaris)을 통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3) 자기 통제의 덕 (enkrateia): 우리의 의지는 맹목적이고 취약하다. 의지의 맹목성을 통제하고 의지의 약함을 당하게 단련하는 것은 훈련과 수양이 필요하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통제의 힘이 절제라는 미덕의 토대이다.
논리적 강제와 실천적 요구
논리적 삼단논법은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강제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전제)
X는 인간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X는 죽는다: (결론)
누가 추론하더라도 이 결론이 반드시 도출되어야 한다.
실천적 삼단논법 (Practical Syllogism)은 대전제가 결론을 단지 조건적으로만 강제한다.
Hou Heneka (궁극목적): (대전제)
목적 실현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들: (소전제)
요구된 것을 한다: (결론)
나는 수학 교수가 되고자 한다 (Hou Heneka, 궁극목적)
수학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 박사학위를 얻으려면 학점을 먼저 이수해야 한다.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서는 미적분을 신청하고 수료해야 한다. = 궁극목적을 이루기 위해 요구되는 것들
그래서 나는 미적분을 신청해서 학점을 딴다: 결론 (필연적 강제가 아니라 조건적 강제다)
스스로 지는 짐은 무겁지 않다.
필연과 조건의 강제적 차이
All men must die
Must = without exception
You should speak English
실천적 삼단논법은 대전제가 결론을 조건적으로만 강제한다.
It is expected that you are able to speak English.
중용 (中庸) ≠ 중간 (中間)
플라톤은 지혜 (Wisdom), 용기 (Courage), 절제 (Temoerance), 정의 (Justice)를 인간의 4주덕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교는 이것 이외에 믿음, 소망, 사랑을 7주덕으로 추가한다. 중용에 따른 행동이 실천적 덕에 따른 행동이 된다.
이것은 적시 (適時). 적중 (適中). 시중 (時中), 적당 (適當), 적합 (適合)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 (Practical wisdom = phronesis ) ≠ 극단 (Extreme)
사례
코로나 19 백신이 가장 필요할 때 (적시)에 개발되어서 인류는 질병으로부터 구했다.
방역 요원들을 적재 적소에 가장 적합하게 배치해서 잘 그리고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내 몸이 허락하는 한에서 약을 적당하게 복용했다. 적당 ≠ 대충대충
포병은 왜 영하 5도 이하일 때는 전투해서는 안되는가?
용기는 만용도 아니고 비겁함도 아니다. 용기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이다.
지혜 ≠ 지식
성격의 탁월함은 인간이 행동을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반복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진다.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단련되고 강화된다. 덕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덕은 행위 증명서이다. 이것이 에토스의 근본 의미이다.
좋은 음악가는 음악을 연주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노력이 우리를 천재로 만든다. 경건한행동을 함으로써 경건한 신앙인이 된다. 정의롭게 행동함으로써 의로운 인간이 되어 간다.
잘 판단하기 위해서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capacity to judge)을 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잘 행동하기 위해 도덕적인 심사숙고를 동반한 판단을 내렸다.
나는 두렵다 (신중함) ≠ 나는 무섭다 (겁쟁이)
실천적 현명함
기업가는 언제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언제 투자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백신 개발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코로나 19에 가장 잘 대처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나는 식습관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
불확실한 미래에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삶의 지침들은 무엇인가?
4-3. 행복에 대한 윤리적 논쟁, 아리스토텔레스, 공리주의, 스토아학파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의 차이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덕은 있지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덕은 행복의 일차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덕만 갖고서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덕의 충족 이외에도 갖출 것을 갖출 때 행복하다 (건강, 환경, 좋은 친구, 필요한 돈)
스토아 학파, 소크라테스는 덕이 곧 행복이라고 한다
Apatheia =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 모든 열정에서 해방된 냉담한 상태, 동요하지 않는 초연함
행복의 본질적 조건 충족(덕)과 우연한 조건 충족
아리스토텔레스는 금욕=행복으로 여기는 스토아에 대해 거리감을 둔다. 쾌락이나 물질적 욕구 충족도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것은 덕의 충족에 비하면 이차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 (Ataraxia)를 추구한다. 쾌락은 행복한 삶이다. 쾌락은 물질적 충족ㅁ나이 아니라 정신적 충족도 아울러 포괄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즐거움은 쾌락주의의 쾌락(Hedonism)과 구별된다. 삶이 제공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즐겨야 한다.
“부를 경멸하듯이 행동하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부에 도달할 자신이 없는 사람만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혹시라고 그런 사람이 부를 취하게 되면 가장 꼴 보기 싫은 부자가 된다”, 베이컨
“숭고한 의무를 행복과 연결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도덕은 우리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법을 가츠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도 될 만큼 가치가 있는 지를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의 도덕과 의의 수행에 “신이 영광스러운 손길이 미칠지, 즉 그런 아름다운 행동에 적절한 행복으로 보상해 줄 지는 신의 손에 달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공리주의 행복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궁극목적의 실현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되고자 하는 목적을 실현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인간은 선(=충족)을 추구하고 악 (=결핍)을 기피힌다. 공리주의의 행복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공리주의는 심리적 욕구 충족을 제시한다. 인간은 쾌를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 나에게 쾌락인 것이 너에게도 쾌락이라는 보장은 없다.
행복의 존재론적 의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을 충족으로, 그리고 악을 결핍으로 규정한다.
신은 자족한다 (God = All in I)
피조물들은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신처럼 자족하지 않고 단지 동물들처럼 군집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사적인 행복 추구와 공공체의 공공선 추구를 할 때에 진정으로 행복을 느낀다.
필요를 넘어서 본성의 적극적인 실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학에 기초해서 윤리학을 근거 짓는다. 인간의 본성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충족하는 것이 윤리의 내용이다. 윤리는 인간이 잘 사는 거의 조건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필요의 충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욕구의 충족( 대화의 충족, 인간의 공동존재, 인간의 자아실현) 이 있다.
인간은 공적 삶을 통해 자신의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를 일치하고 조화롭게 한다. 인간은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거세된 적나라한 이기적 욕구의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공동체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써만 항상 자기 욕구를 충족한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을 그 자체 자기 목적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마틴 부버
나 - 너 대등한 인격 관계
나 – 그것의 수단관계
공공선과 공유된 선의 차이
공공선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인간에게 공통인 것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로고스다 (헤라클레이토스) 공유된 선은 어느 사회는 그 가치를 공유하지만 다른 사회는 그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독인은 희생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미국은 자발적 애국을 미덕으로 여겼다.
기준이 무엇인가?
영국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최대의 객관적 기준은 무엇인가? 기준이 모호하다.
공리주의는 행위가 초래한 결과의 총량이 그 행위를 초래하기 위해 요구된 희생보다 더 크거나 많을 때 그행위가 정당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1. 누구를 희생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가? 2.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3. 행위자가 이 원칙에 저항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소수의 창조적인 자들이 다수들보다 더 많은 부와 행복을 산출한다면 이것은 공리주의에 위배되는 것인가?
5-1, 추론 (Inference)
추론
추론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전제(Premise)와 결론 (Consequence)이 있어야 한다.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우리는 추론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전제는 사람이 아니다. 결론도 사람이 아니다. 전제가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추론은 우리 인간이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추론(Inference)와 추리 (Reasoning)의 구별
추리는 어떤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활동에 속한다.
추론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하낟. 이것은 연역, 귀납, 가추, 가설 연적적 방법으로구별된다. 이것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다.
라틴어 Dux는 끈다 (Draw)의 의미이다. 말이 마차를 끌 듯이 말이다.
Production: 앞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로 생산한다.
Reduction: 다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환원
Seduction: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의미에서 유괴, 유혹
Introduction: 안으로 끈다는 의미에서 안내 내지 소개
Conduction: 함께 끈다는 의미에서 공동으로 기여
Education: 가능성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
Deduction: 이미 있었던 것을 하나하나 다 털어내는 것
Induction: 그 안으로 하나하나 끌어다 놓는 것
Abduction: 주어진 것으로부터 그것의 원인 내지 근거를 찾아내는 추론
연역추론 (Deductive Inference)
연역(Deduction)에서 접두사 De는 Down의 의미이다. 즉 해체하고 부수는 것을 말한다. Construction은 건설한다는 뜻이지만 건설한 것을 해체하는 것은 Deconstruction이다. 연역은 말 그대로 전제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결론에서 재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연역적으로 추론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전제 안에 이미 있었던 것들을 결론을 통해 다시 한번 재확인 하는 것을 말한다. 전제 안에 없었던 것이 결론에 절대 나타날 수가 없다. 결론에서 도출된 것 들은 이미 전제 안에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연역적으로 추론한다는 것은 전제가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100% 확실하게 보증 (保證)한다.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강제한다. 우리 인간들은 연역적으로 추론할 때 전제로부터 결론을 반드시 그런 것으로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연역추론에서 결론은 전제에 없던 것들이 새롭게 나타날 수가 없다. 그래서 연역은 앎의 확장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것이 연역과 귀납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보증한다. 결론은 전제안에 함의 되어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역추론은 진리 확장이 아니라 진리 보존적 (재확인)이다.
연역에서 전제는 대전제와 소전제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 둘로부터 결론이 100% 확실한 방식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강제한다. 결론은 필연적으로 전제로부터 파생된 것 (Derived From)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대전제, Major Premise)
X는 생명체다 (소전제, Minor Premise)
X는 죽는다 (결론, Conclusion)
연역은 개미가 자기의 침샘을 통해 거미집을 짓는 것에 비유된다. 연역적 추론에서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100% 강제한다. 다라서 연역은 절대로 정도 (Degree)가 아니다. 왜냐하면 연역 추론은 100% 타당 (100/100=1)하거나 부당 (0/100=0)하기 때문이다.
규칙 따르기의 강제성
우리 모두는 연역적으로 추론할 떄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전제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도록 강제된다. 심지어 신조차 예외가 아니다. 연역 추론은 지식의 확장과 무관하다. 이에 반해 귀납, 가추추론, 가설 연역적 방법은 지식의 확장에 기여한다.
타당한 추론
모든 물질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대전제)
X는 물질에 속한다 (소전제)
그러므로 X는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결론)
전제로부터 결론을 일관되게(모순없이 이끌어 냄) 추론하고 있다. 이는 타당하다
부당한 추론
모든 물질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대전제)
X는 물질에 속한다 (소전제)
그러므로 X는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결론)
전제로부터 결론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방식으로 도출된다. 이는 부당하다
추론과 판단은 구별된다.
추론은 진과 위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 추론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낼 때 전제와 결론이 서로 양립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대학에서 글쓰기나 토론 그리고 발표나 논쟁할 때 여러분이 제시한 주장과 이 주장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결론 사이에 일관성 (앞과 뒤가 서로 일치)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다. 일관성 (Consistence)과 양립 가능성 (Compatible)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타당한 추론 = 일관성 유지 = 전제와 결론이 양립 가능
자금성은 서울에 있다 (거짓)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다
자금성은 한국의 수도에 있다 (거짓)
거짓된 전제로부터 거짓된 결론이 도출되었다. 일관성이 있고, 서로 양립 가능하다.
부당한추론 = 일관성 유지 못함 = 전제와 결론이 양립 불가능
자금성은 서울에 있다. (거짓)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다
자금성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있다. (참)
전제는 거짓인데 결론은 참이 도출되었다. 전제와 결론이 맞지 않는다. 일관성이 없고 양립 불가능하다.
화성에 생명체가 산다는 주장은 참 아니면 거짓 둘 중의 어느 하나다. 이것은 논리학이 아니라 학문의 검증 대상이다. 논리학은 진위검증에 관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 추론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할 때 이 도출이 타당한 것인가 부당한 것인가를 따질 뿐이다.
추론은 참과 거짓의 진위 검증이 아니라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그 타당성에 있어서 검토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글을 쓸 때 전제와 결론이 일관성이 있도록 글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추론의 타당성 검증이 하는 일이다. 일관성을 유지하고 글을 써야 좋은 글이다.
5-2. 귀납추론
귀납추론 (Inductive Inference)
연역은 논리적 강제에 속한다. 이에 반해 귀납은 경험적일반화의 정도 충족에 관한 것이다. 귀납추론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과 연관된 추론이다. 귀납은 전제가 결론을 지지하는 정도 (Supporting Degree)에 관한 것이다. 연역이 필연이라면 귀납은 지지정도의 개연성 (Probability)에 관한 것이다.
귀납에서 Induction은 그 안으로 끌어다 놓는 것을 말한다. 귀납은 전제들이 결론 속에서 축적되는 정도를 측정한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례들을 끌어다가 결론 안에모은다. 이 모으는 정도가 개연성의 의미이다. 이 모으는 정도가 개연성의 의미다. 연역이 필연성 (Necessity, Certainty)에 관한 것이라면 귀납은 개연성 (Probability, Likely, Probably)에 관한 것이다.
연역이 전제 안에 있던 것을 털어내는 것 (Down)이라면 귀납은 전제의 것들을 결론 안에 수집(In)하는 것이다. 연역이 개미집에 비유되면 귀납은 벌집이다.
차이
귀납에서는 필연이 성립하지 않는다. 연역에서는 예외가 성립하지 않는다. 귀납은 실패한 연역이다. 귀납은 지식의 확장과 관계가 있다. 연역은 전제가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강제한다. 연역은 정도가 아니다. 연역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전제가 결론으로 가는 도중에 귀납적 틈 (전제에 없는 것이 결론에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함
귀납은 전제가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단지 경험적으로만 지지한다. 따라서 전제에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결론에 나올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귀납적 틈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관찰한 1000마리의 백조들이 모두 하얀 백조들이었다. 그러면 1001번째 우리가 앞으로 관찰하게 될 백조는 어떤 색인가? 우리는 아직 확인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까지 1000마리의 백조가 모두 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증거로 1001번째 관찰하게 될 백조 역시 모르긴 모르지만 아마도 흰 백조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귀납은 반드시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그 대신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노다 (Probably, Likely)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전제는 결론을 지지하는 정도가 높으면 개연성이 크다고 말하고 전제가 결론을 지지하는 정도가 낮으면 개연성이 낮다고 말해야 한다. 귀납은 전제가 결론을 경험적으로 지지하는 정도 (Supporting Degree)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1000마리의 백조가 모두 흰 것으로 관찰되었기에 이것을 근거로 1001번째 백조도 아마 흴 것이라고 추정해도 좋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흰 백조는 아니다.
1000마리의 흰 백조였지만 1001마리째는 검은 백조일 수도 있음 = 전제에 없는 것이 결론에 나타나는 귀납적 틈이 발생됨 = 필연의 부재
결론에는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이 경험적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필연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2650종의 뱀들을 관찰했는데 지금까지 관찰된 뱀들은 전부가 알을 통해 새끼를 낳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2651번째 관찰하게 될 아나콘다는 어떻게 새끼를 낳을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2650종들이 모두 알을 통해 새끼를 낳았기 때문에 아나콘다도 아마 알을 통해 새끼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실제 관측 결과가 아나콘다는 직접 새끼를 낳았다. 이것은 경험적 관찰의 문제이지 논리적 강제에 관한 것이다. 아나콘다가 직접 새끼를 낳는 것은 경험의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귀납은 전제가 결론을 지지하는 경험의 추론이다. 2652번째 관찰된 살무사는 어떠한가? 이것도 관찰 결과 직접 새끼를 낳는 것이 확인되었다. 전제에 없는 것이 결론에 나타나는 것을 귀납적 틈이 발생했다고 한다. 귀납은 필연적인 것이 통하지 않는다.
귀납은 전제가 결론을 경험적으로 지지하는 정도 (Supporting Degree)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지 정도에 따라 매우 높음, 높음, 중간, 낮음, 매우 낮음 등으로 추론한다. 이 지지 정도는 항상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 ( 0<P<1) 수학에서 확률이 1이라는 것은 100%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수학에서 확률이 0이라는 것은 절대 안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귀납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표현해야 한다. 귀납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해야 한다. 99.9999%는 100%이 아니다. 0.00001%는 0%가 아니다. 반드시 발생한다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다르다.
전제가 결론을 지지하는 것은 일반화의 정도(The Degree of Generalization)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이것을 경향성 (Tendence) 내지 개연성 (Probability)로 표현한다.
전제 중에서 해당하는것들과 전체 중에서 해당되지 않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The 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은 해당되는 것과 해당되지 않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 말할 때 발생한다. 한국인들이 모두 개고기를 먹는다고 말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것이다.
증명(證明)과 증거(證據)의 차이
수학은 증명의 필연성을 기초로 한다. 증명(Demonstration)은 공리로부터 정리를 도출하고 이 정리가 100%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증명은 필연적 강제이다. 수학은 증명한다. 연역적 추론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필연적인 것으로 도출하는 것을 말한다.
증거는 필연이 아니라 지지 정도의 충족이다. 증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결론이 필연저긍로 성립하븐 것이 아니라 결론이 그 만큼 신뢰할만 하다. 증거는 귀납에서 사용된다. 여러분의 레포트나 발표 그리고 토론에서 증거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결론이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증거는 결론을 지탱한다. 증거를 통한 지지는 정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다익선이 통한다.
5-3 가설 연역적 방법 (Hypothesis-Deductive method)
앎은 예측하기 위함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앎은 원리나 근거를 제대로 아는 것에 기초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힘이 지배한다
아는 것이 지배한다
원리나 근거를 아는 자가 지배한다.
이론과 경험의 충돌
가설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가설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입증될 수도 있고 반박될 수도 있다. 이론과 경험이 충돌하면 이론은 폐지되어야 한다. 가설은 잠정적이다. 가설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그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가설은 공적 검증을 통과할 수 있을 때 한해서만 공인된 학설로 인정된다. 이에 반해 공적인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는 가설은 폐지된다. 모든 가설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타당한 것으로 재확인 되어야 한다. 가설은 임시건물이다. 이 임시 건물은 현상을 설명하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우리는 무전제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항상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그 대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가설 연역적 방법은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그 대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가설 연역적 방법은 우리가 미리 알고 있는 것 들로부터 출발해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을 미리 예측하는 추론이다.
이 추론 방향은 가추 추론과 반대로 진행한다. 가추 추론은 이미 알려진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추적하는 추론이다. (From The Known Result To The Unknown Cause) 이 추론 방향은 배진적 (Retroduction)이다. 이에 반해 가설 연역적 방법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알지 못하는 대상을 미리 예측하는 추론이다 (From The Known Hypothesis To The Unknown X) 이 추론 방향은 전진적 (Progression)이다.
예측의 발견 연관성
상어는 고래와 다르게 아가미로 산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고래는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반느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이에 반해 상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잠수함은 산소와 연료를 공급받기 위해 3시간 단위로 수면 위로 부상해야 한다. 이럴 경우 비행기에 발각되면 위험하다.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상어처럼 수면 아래서 계속 잠수할 수 없을 때 산소연료로 사용하면 잠수함은 아주 오랜시간동안 잠수할 수 있다.
5-4, Abduction(가추 추론, 발상법)
문제 해결형 내지 과제 해결형 추론
Abduction(가추 추론, 발상법)
Adbuction은 우리가 이미 그 결론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러한 결론이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이나 이유를 아직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있게 한 이유 내지 원인을 찾아내어서 설명해야만 한다. 이 추론은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 필연(연역)도 아니고 경험적지지(귀납)도 아니다. 우리는 이 추론을 문제 해결 내지 과제 해결형 추론으로 부른다. 이걸은 지식의 확장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귀납처럼 양적인 지지가 아니다. 가추추론은 결과를 있게 한 원인을 찾아내는 추론이다. 우리는 결과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원인들을 찾아내서 만족할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추론의 방향(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있게 한 원인으로)
원인이나 이유는 아직 모름 <- 결과(주어져 있음)
결과로부터 원인의 방향으로 추론(retroduction)
한국은 코로나19를 잘 대처했다. 전 세계는 왜 한국이 코로나19 대처에 있어서 이런 효과를 내고 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한국이 코로나19를 잘 대처했다는 것은 이미 그 결과가 수치로 다 나와 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은 한국이 도대체 어떤 조처를 취했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의 그 원인이나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원인이나 이유는 아직 설명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가 주어진 것으로부터 그 결과를 있게 한 원인 내지 이유를 찾아내서 설명하고자 할 때 가추적으로 추론한다고 말한다. 이 추론은 문제 해결행 내지 과제 해결행 추론이다.
The unknown cause <-배진적- The known result
코로난19의 원인(모른다) <-원인을 찾아내야 할 과제-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안다)
우리는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아직 미해결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밝혀내야 할 과제 내지 숙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 원인을 어떻게 찾아내어서 완성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가 코로나19와 진정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도전이고 과제이다.
우리는 독일이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도 왜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켜야만 했을까? 이 원인은 아직도 역사가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남아 있다. 바레스는 독일인의 본능적 야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전쟁에 대한 본능적 야만성이 있다는 바레스의 지적은 진정한 근거나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독일이 왜 두 번의 참혹한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보다 타당한 근거 내지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역사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다.
우리 모두는 이 원인이나 근거를 해결하도록 추론하고 잇다. 그래서 우리는 원인이나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작업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인터넷이나 노트북을 사용하는 학생들에 비해 수학 문제를 더 잘 풀고 있다. 이것은 이미 경험적을 확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동부 13대학이나 유럽에서는 수학시간에 수작업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자 그렇다면 첨단 기계를 사용하는 학생보다 왜 수작업으로 직접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수학 성적인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선 세계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수학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 원인이 무엇인지를 해결하는 중이다. 아직도 만족할만한 원인 제시는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과제는 여전히 그 해결을 위해 진행 중이다. 가추 추론은 이미 주어진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찾아내는 추론이다. 추론의 방향은 결과로부터 원인에게로 향한 것(the result to cause) 즉 배진적이다.
귀납 추론은 전제가 결론을 경험적으로 지지하는 추론이다. 이것은 양적인 지지에 관한 것이다. 가추 추론은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추적하는 추론이다. 우리는 아직 그 원인을 모른다. 따라서 이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질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가설 연역적 방법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잇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예측하고자 한다. 예측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가설 연역적 추론은 그렇기 때문에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
추론의 차이
연역 추론은 지식의 확장과 무난하다. 귀납, 가추 추론, 가설 연역적 방법은 지식의 확장과 관련된다.
6-1, 언어 사용의 적합성
개념의 의미는 개념을 적합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비트겐슈타인)
애매한 표현을 정확하게 홖정해서 사용할 것
애매(ambiguous)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의 가능성들 때문에 우리를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만든다.
양서류(amphibios)는 두 군데 이상 서식하는 생명체를 말한다. 애매하다는 것은 때로 중의적 내지 양가적으로도 사용이 된다. 이것은 최소한 2개 이상의 의미나 지시 대상을 지니고 있다. 애매한 용어들의 사용은 우리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정확하게 의도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He killed me with a gun.
이 문장은 매우 애매하다. 첫 번째 해석은 그가 총을 갖고서 나를 죽였다로 해설할 수 있다. 총을 갖고서 나를 죽였다로 해설할 수 있다. 두 번째 해석은 그가 총을 들고 있는 나를 죽였다로 해설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둘 중의 어느 해석이 타당한 것인가? 우리는 이 문장을 해석할 때 with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 뜻을 명확히 확정해야 한다.
The end of life.
이 구는 애매하다.
1) 왜냐하면 이 구는 첫째 인생의 목적으로 해설될 수 있다.
2) 두 번째는 인생의 끝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이 두 가지 가능성들 중에서 어느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 그래서 매우 혼란스럽다.
사례분석
감이 안 좋다.
향수가 좋다. (고향 생각인가 아니면 좋은 냄새인가)
이 회사는 과장이 많다.
이 집은 경사가 있다.
눈이 차갑다.
비스마르크는 큰 사람이다.
이 문제는 무겁다.
관광객들은 성을 좋아한다.
사과가 필요하다.
차가 좋다.
모호(vague)
모호한 것은 기준(criteria)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국가는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내일 우리 학교는 머리가 긴 학생들을 단속할 것이다. 머리가 길다는 것에 대한 정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해서는 벌금을 부과할 것이다. 미풍양속의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예술과 외설의 객관적 기준은? 이 영화가 상연될 수 없다고 할 때 상연 금지의 객관적 기준은 무엇인가?
다르다(difference)와 틀리다(wrong)의 차이
수학과 논리는 정답과 오답이 분명하다. 수학 문제를 틀리게 푼 것이지 다르게 푼 것은 아니다. 틀린 것에 대해서는 관용이 불필요하다. 신조차 수학문제를 틀리게 풀면 0점이다. 우리 모두는 문제를 풀도록 강제된다. 예외 없다. 다르다는 것은 어떤 사태에 대해 서로생각을 달리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감각을 하찮게 여기고 경멸한다. 니체는 감각이 우리가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조건들이라고 평가한다. 에로스를 독살하는 플라톤에 대하여 니체는 에로스를 활성화하는 삶을 옹호한다. 이들 중 누가 옳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사고하는 지를 따져야한다.
틀리다는 정답의 반대이다. 따라서 틀린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면 안 된다, 정답이 아닌 것을 관용의 원칙에 의해 정답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다르다에 대해서는 관용이 필요하지만 틀리다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100점 아니면 0점만 있다. 정도는 불필요하다.
다르다는 의견, 생각, 맛, 취미, 경향, 세계관, 정치적 선호 등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차이는 관용이 인정되어야 한다.
틀린자와 논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자와 논쟁할 수는 있다.
설들의 정도는 높을수록 좋다
놀이(play, game)와 규칙(rule)의 차이
규칙은 매우 엄격하게 정의된다. 축구는 11명이 한다. 규칙의 적용은 엄격하다. 축구는 손으로 하면 안 되지만 미식 축구는 손으로 하는 것이다. 축구는 패널티 영역 안에서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을 받는다.
정의(definition)는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정의는 말 그대로 뜻과 의미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의미를 제한한다는 것을 말한다.
가족은 느슨하다. 2명도 가족이고 3명도 가족이고, 11명도 가족이다. 핵가족도 가족이고 대가족도 가족이다. 가족은 느슨하게 적용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서 사용은 경우에 따라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에 따른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한다. 언어는 상호 이해의 공통 조건이다. 피라미드는 언어가 판독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집트인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잉카는 마추픽추의 유물이나 유적이 있지만, 잉카는 언어가 없었다. 우리는 마추픽추에서 잉카인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추측만 하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없으면 정체성도 그리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잘 파악한 것처럼 우리는 그 언어를 실제로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을 통해 삶의 방식(form of life)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는 한 민족의 자서전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영국인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그 언어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식을 알아듣는 것을 뜻한다. 괴테는 자신이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중국을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고 말한다.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6-2, 언어 게임의 다양성
놀이는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서로의 이해를 가능하도록 한다.
공통감각(sensus communis, common sense)
나의 생각을 선입관, 편견, 독단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 내가 참을 말하려고 하듯이 타인도 참을 말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서로의 공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의 입장에서 나의 입장이 과연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상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타인이 나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가 입장을 바꾸어서 사고하는 것은 서로가 타자의 입장에서 자기 입장의 편협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나의 생각이 나에게만 타당하지 않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당성이 있도록 그렇게 나의 생각과 견해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비(non)와 반(anti)의 차이
비(non)는 집합에 있어서 무엇에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 속하는 것(이순신, 히틀러, 토마스 등등)과 인간에 속하지 않는 것(코끼리, 사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비인간적(non human being)이라는 것은 분류상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사자는 비인간에 속하지만 히틀러는 인간에 속한다.
반(anti=against)은 무엇을 파괴하거나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반인간적(anti human being)은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나치는 반인간적(인간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행위를 저질렀다. 히틀러는 반인간적 혹은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나치는 우리와 같이 인간이다. 하지만 나치는 인간성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짓을 했다. 그래서 반인간적이다.
비논리적(non logical thinking)사고와 반논리적(anti logical)사고
비논리적 사고는 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고를 말한다. 예술의 영감 능력, 직관적 사고, 예언적 사고, 통섭하는 사고 등은 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고에 속한다. 논리에 속하지 않거나 논리를 초월하는 사고는 가능하다. 비논리적 사고는 논리에 속하지 않는 사고를 말한다.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논리적 사고는 사고 규칙에 어긋나거나 위배되는 사고를 말한다. 어느 누구도 모순을 어기고 사고할 수는 없다. 논리를 부정하거나 논리 규칙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고는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논리적 규칙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
차이와 차별의 구별
차이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정되어야 한다. 남자보고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다. 능력의 차이, 자연적 차이, 고래와 소의 차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 그래서 성(sex)은 자연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성, 여성으로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별은 이간이 인간을 상대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성차별을 금지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성차이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에서 성차별을 경험한다. 차별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만든 것이다. 인종 차이는 인정되어야 하지만 인종차별은 금지 되어야 한다. 차이는 자연적 차이이지만 차별은 인위적 억압이고 폭력인 것이다.
자연적 차이(natural difference)는 인정된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 문화적이고 인종적인 차별은 금지된다.
인간의 성차이는 자연적으로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하지만 인산은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인종 차이는 인정되지만 인종 차별은 금지된다. 성 차이는 인정되지만 성차별은 허용될 수 없다.
포함(inclusion)과 포섭(subsume)의 구별
포함은 공간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의 관계를 말한다.
큰 것이 그 안에 작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 반대는 아니다. 서울이 그 안에 관악구를 포함한다. 명지대와 건국대 캠퍼스 안에 강의실이 있다. 강의실 안에 의자와 책상들이 있다.
포섭은 개념의 분류와 관계한다. 포섭은 그 밑에 개별적인 것들을 지니고 있다. 산이라는 일반 개념 밑에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을 포섭하고 있다. 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은 공통을 대표한다. 산은 그 밑에 개별적인 산들을 포섭한다.
대표(represent)와 대체(replacement)의 차이
모든 개념들은 공통을 대표한다. 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산들(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등)을 공통으로 대표한다. 칸트는 개념을 보편 표상(대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자이다. 학생회장은 해당학교를 대표한다.
대체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다른 것을 갖다 놓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디지털을 통해서 아나로그를 대체한다. 박지성을 대체할 선수가 누구인가? 박지성에 자리에 누구를 갖다 놓을 것인가? 산이 백두산을 대체할 수 없다. 산은 모든 산들을 공통으로 대표하는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손흥민을 대체할 선수를 찾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는 지동설이 타당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했다. 그래서 우리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대체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과학 철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교체(paradigm shift, paradigm replacement)라고 설명한다.
자연과학에서 패러다임이 해당 현살들을 설명하지 못하면 해당 현상들을 보다 잘 설명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대체된다. 쿤은 이것을 패러다임이 변화한다고 규정한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을 쓸어버리듯이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옛 패러다임을 대체 내지 극복했다고 말한다. 핸드폰이 전화기를 대체했듯이 말이다.
원자는 깨지지 않는다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은 현대의 원자론(원자는 깨질 수 있음)에 의해 대체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상이 다른 세계상에 의해 대체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대체의 속도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정적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허블의 경험적 관찰에 의해 반박되었다. 우리 은하계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진리 주장은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진리 검증을 통과한 이론만이 패러다임의 진정한 주인이다. 이 패러다임도 다른 패러다임의 반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한에서만 매우 잠정적으로 진리를 유지할 뿐이다. 과학은 시행착오(trail and error)에 의해 발전한다.
고전을 시대의 도전을 통해서 살아남는 것을 말한다. 진리, 도덕, 아름다움도 도전을 통해 살아남을 때 한해서만 고전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골동품과 고전은 구별된다.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실질적인 신세계는 어느 결정적인 자리에서 지금까지 과학이 서 있었던 그 밑 바탕을 박차 버리고, 말하자면 허공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성 이론에서 그때까지의 물리학이 확고한 바탕으로 삼고 있었던 동시성의 개념을 비판했다. 그리고 많은 지도적인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은 동시성에 관한 종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상대성 이론의 결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그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세계로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고 구조물을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받아들일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적인 한 발짝을 내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라이프치히 자연과학자 대회에서 처음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론에서도 본질적으로 어려운 고비가 눈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중에서)
놀이는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서로의 이해를 가능하도록 한다.
나의 다른 타인의 생각에 대한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흑백논리의 오류를 피해야 한다. 희지 않다고 해서 검은 것은 아니다. 희지 않은 것은 노랗고, 파랗고, 붉을 수도 있다. 따라서 희지 않다고 해서 검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틀린 답의 반대는 정답이다. 하지만 의견들이 다른 세상에서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가 틀린 것은 아니다.
히틀러: 독일에는 애국자 아니면 매국노만 있다. 전형적으로 그는 불관용의 인간이고 흑백논리의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
나치는 우리와 같이 인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으로서 인간성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야만적으로 비판한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the banality of evil(악의 평범성)
나는 상관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나는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나는 나의 직업에 충실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명령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6-3, 논증과 논쟁의 차이
논리학과 수사학의 차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어의 argument는 어떤 이는 논증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논쟁(논변)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아주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증은 추론의 필연을 다루는 강제성을 뜻하고 논쟁은 누가 누구를 설득하는 권리싸움을 의미한다. 논증은 논리학과 수학의 대상이지만 논쟁은 누가 누구를 상대로 견해 차이 때문에 상대방을 설득하는 권리싸움을 말한다.
논증(論證): 필연에 관한 것
1) 논증이란 어떤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명제들의 나열이다.
2) 앞에 오는 것은 전제(premise)라 하고 맨 마지막 주장을 결론(conclusion)이라 한다.
3) 논증이란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연역적으로 추론한다고 한다.
4) 논리적 분석은 논증 내용의 내재적 가치를 정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전제들이 참인 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논증의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과 변증론
분석론(analytic, 分析論)은 필연을 다룬다. 필연은 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수학의 증명은 필연적이다. 논리에 있어서 연역추론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필연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변증론(dialectic, 辯證論)은 필연이 아니라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
설득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변증론은 정치, 경제, 견해 차이, 세계관의 차이에서 진행된다. 이것은 권리 싸움에 속한다.
사례 분석
모든 인간은 죽는다.(대전제)
x는 인간이다.(소전제)
그러므로 x는 죽는다.(결론)
어느 누가 추론하더라도 우리는 대전제로부터 결론을 필연적으로(반드시)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추론은 강제성을 지닌다. 이렇게 추론하지 않은 자는 0점이다.
트럼프가 이번 대선에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재선에 성공할 것이다. 트럼프의 재선에 찬성하는 논거
트럼프는 이번 대선에서 이어 이러한 이유로 인해 재선에 실패한다. 트럼프의 실패에 대한 강한 논거
이 논쟁은 필연이 아니다. 이 논쟁은 기껏해야 상대를 설득하는 논거 제시만 하는 것이다.
논쟁(論爭)= 입증책임(burden of proof, burden of justification)
논쟁의 구조(the structure of disputation)는 다음과 같다.
1) 논쟁 당사자들은 항상 어떤 특정한 테마들(안락사, 자유무역, 재 지원금을 누구에게 우선 배분할 것인가?, 남북통일, 유전자 복제의 허용 가능성 등등)에 대해서 논쟁한다.
2) 논쟁 당사자들은 찬성(for, pro)과 반대(against, contra)로 입장차이를 보인다.
3) 논쟁은 누가 또 다른 누구를 설득하기 위해 한다. 논쟁의 목적은 좋은 논거를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다.
4) 설득은 성골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수학과 논리는 싸우지 않는다. 2+3=5이다. 5를 쓰지 않은 자는 무조건 0점이다. 5를 쓰면 100점이다. 수학은 증명의 강제성에 기초한다. 논리는 추론의 강제성에 기초한다.
논쟁은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설득해야만 하는 권리싸움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dispute, refute)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논쟁하면서 그듫의 기본 주장을 논박한다. 플라톤은 이데아(really real, ontos on)를 통해서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homo mensura)를 반박한다. 논박술은 공격과 방어의 싸움이다. 다만 근거를 제시하는 것(logan didonai)이 있어야만 한다. 재선 성공(공화당의 입장)과 재선 실패(민주당의 입장)를 놓고 미국은 공방전을 벌인다. 이것이 바론 토론(discussion)의 의미다.
대화의 방향
라틴어 cur는 달린다는 의미다. 함께(con) 달리면(cur) 우리느 이것을 경쟁(concurrence)한다고 말한다. 라틴어 dis(aprt)를 뜻한다. 이러 저리 달리는 것이 바로 discussion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서로 의견들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교차 검증한다. 이들의 대화 방향은 수평적(<->)이다.
플라톤은 우리 모두가 독사(doxa)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사는 검증된 것일 수도 있고, 검증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독사를 참으로(from doxa to really real)상승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그가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homo mensural)을 비판하는 이유다.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 방향은 상승적이다.
논쟁은 결론을 강제할 수 없다.
하버머스는 “대화의 목적은 합의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합의에 도달한다는 보장이나 필연은 없다.
틀린 논쟁은 없다. 불충분한 논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른 논증은 없다. 하지만 틀린 논증은 성립한다. 논쟁은 논증처럼 결론을 강제할 수 없다, 논쟁에서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있다.
개방성과 정직성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똑같을 필요는 없다.
화쟁론(和諍論): 싸우되 그러나 화해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논쟁의 차이를 더 확인하게 된다.(데리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화해나 결론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것이 설득의 핵심이다.
논쟁 당사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주장에 대해서 교차 검증한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할기 위해 타당한, 설득력이 있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이번 학기 논문 첨삭할 때 여러분들은 2페이지에 걸쳐서 나를 설득시켜야 한다. 설득한다는 것은 정보를 그냥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컴퓨터가 가장 잘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설득을 제시하지 못한다. 여러분들이 논거를 통해서 나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을 잘 하는 것이 좋은 점수의 기준이다. 그냥 자료를 나열한 것과 논거를 충분히 제시하면서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설득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수사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유럽 대학은 최고 8학기를 이런 설득 훈련에 투자한다.
7-1, 진리와 독사의 관계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나 대중성에 몰두함으로써 자기 삶의 주인이기를 회피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방종을 통해 자신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전략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토아학파, 실존철학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철학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새롭게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삶을 검증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
1) 너는 신이 아니다.
2)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너의 유한성을 자각하라.
3) 너는 너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의 대결에서 덕을 통해 테크네를 극복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은 능력의 탁월함을 좋은 목적을 위해 평생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훈련함으로써 얻어진다. 덕은 제2의 본성이다.
“인간은 본성상 행복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teleology): “모든 기능들과 활동들은 목적을 추구한다. 목적은 완성(telos)을 실현하고자 한다. 모든 기능들과 활동들은 완성을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자연안에서 헛되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행복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충족된 삶(the fulfilled life, the accomplished life)이 행복이다.
현상을 구제(구원)함으로서의 철학
플라톤은 철학을 현상을 구제(구원)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어떤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모든 진리 주장은 일차적으로 판단중지(epoche)된다.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의심하라”(데카르트)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logan didonai, giving a justification)을 입증해야 한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독사(doxa=it for granted that~)가 아니라 정당화된 참된 독사(the justified true doxa(belief)를 진리라고 표현한다
사고의 본성이 변증법적이다.(헤겔)
우리의 독사, 선이해, 가설, 믿음, 주관적 확실성, 선판단, 친숙함 등은 이것이 진리로 입증된 것이 아닌 한에서 검증의 대상이 된다.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의심하라. 검증할 수 없을 때까지 검증하라. 모든 진리 주장은 검증되기 이전까지는 다 판단중지가 된다. 진리로 검증된 독사만이 진리의 자격을 비로소 얻는다. 헤겔은 독사와 함께 그러나 독사에 거역해서 사고하는 것을 변증법 (Dialectic)으로 규졍한다.
진리는 사태의 참에 기초한다.
“진리는 비판받기를 원하지 결코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니쳬)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다.
이데아를 통해 인간척도론 극복하기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homo mensura)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참으로가 모든 것의 기준으로 정의한다. 이데아란 ontos on, really real(참으로)의 의미이다. 참으로(idea)를 통해서 인간척도론(homo mensura)를 극복하는 것이 플라톤과 이데아론의 골격이다.
독사와 함께 그러나 독사에 거역해서 사고하기(with doxa and against doxa)
비난 (Reprimand)이란 근거없이 타인을 비방하고 욕하는 것이다.
비판 (Krinein, Critique) 이란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limit and beyond limit)
“우리는 경계를 넘고서야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칸트의 비판철학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을 명백히 한정함으로써 앎을 초월한 것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나는 신앙에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앎의 한계를 명백히 설정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uober muss man schweigen, Wittgenstein)
사람들은 고립되면 거짓 천재가 된다. 우리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진리가 아닌 지를 계속해서 검증하고 살아야 한다. 플라톤은 이것이 동굴에 갇힌 자들의 탈출로 규정한다. “철학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철학은 현실로 나아가지만 불완전한 철학은 현실을 도피한다.”(야스퍼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성경)
7-2, 분석론과 변증론, 그리고 추론
분석론(analytic)과 변증론(dialectic)의 차이
분석론은 필연을 다룬다. 논리적인 추론에서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강제한다. 수학에서 공리는 정리가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보증한다. 필연은 강제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다.(프레게)
변증론은 한 사태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른 자들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논쟁술을 말한다. 이것은 필연이 아니다. 따라서 엄격성이 분석론에 비하면 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설득을 다루는 대상으로 정의한다.
논증 (論證)과 논쟁 (論爭)의 차이
논증은 논리적인 추론의 대상이다. 논증은 전제로부터 .
논증은 타당하거나 부당하다. 따라서 다른 논증은 없다.(무의미하다.)
논쟁이란 어떤 한 사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다른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려는 권력싸움이다.
논쟁은 필연이 아니라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 충분하거나 불충분한 논쟁은 있어도 틀린 논쟁은 다르다.
논쟁의 구조 (The structure of Discussion)
1) 모든 논쟁은 항상 무엇에 대한 논쟁이다. 논쟁에는 항상 논쟁테마가 있다.(안락사, 유전자 복제, 자유 무역, 청년실업, 성정과 환경의 갈등, 자연 보호 등등)
2) 찬성과 반대(for<->against, pro<->contra)로 입장들이 양분화 된다. 입장들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한다. 차이가 논쟁의 조건이다.
3)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목적 때문에 논쟁한다.
4) 설득은 반드시 된다는 보장이 없다.
논쟁에 있어서 입증 책임
모든 논쟁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입증책임 (Burden of Justification, Burden of Proof) 을 진다. 상대방의 이의 제기에 대해 그것을 타당하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논쟁의 설득 충족 요건이다.
논증>논쟁>담소
수학은 증명하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 추론역시 논쟁이 아니다. 논증은 필연을 다룬다. 논증은 100% 확실하다. 논쟁은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권리 싸움이다. 설득이 반드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담소는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것은 논쟁보다 약하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
연역은 논리적 강제다. 전제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보증한다.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해내는 것이 연역 추론이다. 연역에서는 예외가 배제된다. 연역은 지식의 확장과 무난하다.
귀납은 전제가 결론이 성립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지지하는 정도에 관한 추론이다.
귀남에서는 필연이 배제된다. 연역은 정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귀납은 지지정도의 등급(Supporting Degree)에 관한 것이다. 귀납은 지식과 관계가 있다.
예측이나 발견을 목적(가설 연역적 방법), 과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추 추론
앎은 예측하기 위한 것이다.(베이컨), 이론의 힘은 예측하는 데 있다.(하이젠베르크)
가설 연역적 방법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잇는 것들로부터 알고자 하는 대상을 예측하거나 발견하려는 추론이다. 이 추론 방향은 전진적이다.
가추 추론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결과로부터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원인을 소급해서 찾아내려는 추론이다. 이 추론 방향은 배진적이다. 주어진 결과로부터 아직 해명되지 않은 원인을 찾아내야만 하는 추론이다.
7-3,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애매함(Ambiguous)와 모호함(Vague)의 구별
애매함은 두 가지 이상의 의미나 지시 가능성 때문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회사는 과장이 많다 (직급으로써의 과장, 혹은 허언을 뜻하는 과장)
모호함은 기준(Criteria)이 불명확할 때 발생한다.
국가는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이다
비 (非, non) 과 반 (反, anti)의 차이
비는 분류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인간적 행위는 인간에 속하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인간이 사자처럼 네 발로 걷는다면 이것은 비인간적 행위가 된다.
반은 파괴 내지 부정하는 것이다. 반인간적 행위란 인간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나치는 반인간적 행동을 한 것이다.
차이 (差異, Difference) 와 차별 (差別, Discriminate)의 구별
차이는 자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차이는 인정된다. 남과 여는 자연적으로 암컷 아니면 수컷으로 차이가 난다. 성차이와 인종차이는 인정된다.
차별은 인위적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역사적 문맥에서 부당하게 차별하는 것을 말한다. 인종차별을 폐지되어야 한다. 성차별도 금지되어야 한다.
대표 (代表, Represent)와 대체 (代替, Replacement)
하나가 다수를 공통으로 대표한다. 문재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다. 건국대나 명지대를 대표할 학생회장을 뽑느다.
대체한다는 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체하는 것이다. 한국 축구는 박지성을 대체할 수 있는 선수를 찾아야 한다. 박지성의 자리에 누구를 대체할 것인가?
포함 (包含)과 포섭 (包攝)의 차이
포함 (Ionclusion, contain)은 공간의 관계이다. 용인이 그 안에 (in) 명지대를 포함한다. 충주가 그 안에 건국대를 포함한다.
개념은 공통을 대표한다. 개념은 그 밑에 (Under) 개별적인 것들을 포섭 (Subsume, Stand under the concept)한다.
패러다임 대체 (교체, Paradigm-shift, Paradigm Replacement)
이론과 경험의 충돌은 이론을 수정하도록 한다. 인류는 천동설을 2000년 동안 진리로 믿어왔다. 하지만 천동설은 더 이상 경험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했다. 즉 패러다임이 변화된 것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의 교체로 인해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개별, 특수, 보편
개별적인 것: 지시 대상이 단 하나인 것
특수한 것: 적용 대상이 일부에게만 한정된 것
보편적인 것: 적용대상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
일부에게 해당하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면 이것은 나에게도 해당한다. 특수와 보편은 비대칭적이다.
칸트의 공통감각 (Sensus Communis, Common Sense)
칸트는 개별적인 것의 보편화 가능성을 공통감각의 능력으로 규정한다.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은 비대칭 관계에 있다. 하지만 개별적인 것들도 보편화가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칸트는 공통감각을 미적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다.
놀이 (Play, Game)와 규칙(Rule) 의 차이
놀이에는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이 있다. 놀이에는 느슨한 유대성이 있지, 엄격한 보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의 놀이를 통해 이해된다.
규칙 (Rule)은 엄격하다. 규칙 따르기는 강제성의 지배를 받는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공유하고 나누어 갖는 것에 기초한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의 실천적 지향성을 통해 특징지워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라고 주장한다. 사용중에 있는 언어 (Language in Use)는 언어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형식들 (Form of Life, Lebensformen)을 같이 공유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