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군대/군대 에세이 (4)

새벽 2시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밤. 포근히 내리는 함박눈에 모두가 창문을 닫고선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이불 속에서 따뜻한 숨을 내쉴 때 한 사람만이 베란다를 열고선 추위와 마주한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과 목에 너무도 생경하게 와닿자, 다시 창문을 닫고는 마치 추위를 바라보려는 것처럼 유리창에 몸을 기댔다. 왼손에 잡히는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을 자못 즐기는 듯싶었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연다. 눈꽃 한 송이가 담배 끝에 내려앉는다. 왼 엄지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뚜껑을 열고선 금색 지포를 비스듬히 세워 달빛에 반사해본다. 피식 웃으면 만족스러운 눈길로 불꽃을 일으킨다. 눈 깜짝할 새 담배의 회한과 주름이 늘어난다. 입에서 나오는 게 서리 어린 입김일지, 삶의 애환을 한순간..

지금 생각해보니 공군 기본군사훈련단도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하루도 땀으로 샤워를 안 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 할 만했었다. 나의 훈련소 시절을 버티게 해주었던 원동력은 과거로부터의 후회와 도전정신이었다. 의지가 부족했던 내가 그 힘들다는 공군 훈련소를 무사히, 열외 없이 수료하면 얼마나 기쁠까? 라는 다짐이었다. 전투뜀걸음때는 오히려 체력을 길러서 갔어 그런가,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었다. 무사히 뜀걸음을 마치고 난 후의 성취감은 대단했다. 해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 사격 때는 되레 못해서 아쉬웠다. 난 내가 잘 쏠 줄 알았다. 참 아쉽다. 이론시험 때는 인영이의 도움이 컸다. 참 고마운 친구다. 나도 인복이 참 많아서 좋다.

항상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담배였다. 척박하다 못해 메마른 적갈색 고원 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저 사내의 생기 없는 두 눈동자를 보라. 그에게 필요한 것은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의 한편을 채워줄 무언가였다. 감히 무엇이 사나운 야수의 욕망을 채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게걸스럽게 적마와 살의를 내비쳐오는 절박한 상황 속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노란 빛기둥이 될 수 있는가?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순간의 가림막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있어 담배는 구원이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루시드의 손길이었다. 그렇다. 단지 한 개비의 담배만이 그가 원하는 방식의 구원이자 스스로 하사하는 용서였다. 처음 불을 붙일 때의 그 감정을 문득 어색하게 여긴 그는 곧 능숙한 손놀림으로 재를 털어낸다. 고요한 ..

기억이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며 사람의 감정과 순간을 제 입맛에 바꿔버리는 능력을 가졌다. 아무리 힘들고 서럽고 죽을 것만 같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하게 되고 미화가 되며 좋았던 순간들만 기억나게 된다. 어쩌면 시간이 우리의 기억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일까? 기억나는 순간들이 몇 있다. 처음으로 훈련소 생활관을 들어갔을 때의 그 진하던 나프탈렌 냄새. 처음 보는 얼굴들과 험악한 인상의 동기들. 어두 칙칙했던 생활관의 조명과 이미 못 쓸 만큼 녹이 슬어버린 관물대. 판초 우의를 입고 검정 쓰레기봉투에 도시락을 받아 들고 추적추적 걸어가는 발걸음. 씹는 소리만 들리던 18시. 불편한 순간들. 격리자로 분류되어 조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때. 페이스 실드와 장갑을 끼고 모든 짐을 박스에 담던 그때. ..